계약조건
4. 부정청탁 금지
“다 했다!”
트리 맨 꼭대기에 별을 다는 걸 가지고 한참 유난을 떨던 덕화가 마침내 적절한 위치를 잡았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지? 하고 묻는 덕화의 말에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기던 신은 슬쩍 시선을 올렸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허, 하고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트리냐?”
“응. 누가 봐도 트리지?”
과연 누가 봐도 트리일까.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든 신의 시선이 다시 책으로 향했다. 저 정신 사나운 것을 보고 있느니 글이라도 한 자 더 읽는 게 심신 안정에 좋을 듯했다. 신의 반응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입술을 삐죽이던 덕화는 마침 방에서 나오는 사자를 발견하곤 그를 불러 세웠다.
“끝방 삼촌! 이거 어때요?”
덕화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간 사자의 표정은 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해 보이기도 했다. 한참 할 말을 잃은 채 트리를 눈으로 훑던 사자가 짐짓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날 위해 만든 거라면 나 저 나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뭐가요?”
“저 나무 말이다.”
“트리가 왜요?”
“트리? 성황당 나무가 아니고?”
소파에 앉아있던 신의 입에서 풉 웃음이 터졌다. 둘의 대화를 듣느라 책장은 어차피 한 장도 넘기지 못하고 있었으면서 시선만큼은 여전히 글자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도깨비의 비웃음과 저승사자의 진지함에 두 배로 상심한 덕화는 대체 왜 이 예술 작품을 이해하지 못 하느냐 궁시렁거렸다. 그의 손이 트리 맨 꼭대기에 있던 별을 떼냈다. 아마 그 별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에게는 그 별만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였지만.
덕화가 성황당을 닮은 트리를 다시 손보는 사이 사자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그 발걸음 소리에 신이 보고 있던 책을 뒤집어 제 무릎 위에 올리며 물었다.
"어디 가, 친구?"
저놈의 친구 소리. 휙 고개를 돌려 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사자의 눈썹 사이가 찌푸려졌다. 신은 왜 그러나, 친구? 하고 또 한번 태연하게 친구 소리를 했으나 이 집안에서 그 말에 익숙한 건 오로지 도깨비뿐인 듯했다. 덕화 역시 뜨악한 표정으로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뭐야. 둘이 언제 친구 먹었어?”
“먹긴 뭘 먹어. 너 친구 먹고 그러면 못 쓴다.”
“시끄럽고요.”
“작게 말했어.”
성년의 남자 둘이 나누는 거라고 믿기 힘든 수준의 대화를 들으며 사자는 제 이마를 짚었다. 그 와중에도 한심한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900살이나 됐는데 끝방 삼촌이랑 친구 먹으면 삼촌이 너무 손해인 거 아니냐는 덕화의 계산 빠른 질문에 신은 내가 많이 봐줬지, 하고 퍽이나 인자하게 답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그 대답을 들은 덕화는 역시 우리 삼촌이 마음이 넓다며 치켜세우기 바빴고 신은 내가 좀 그렇다며 철없이 웃어댔다. 친구 싸움 칼로 물 베기라고 뜻도 안 맞는 속담을 끼워 맞추는 것까지 듣던 사자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몸을 돌렸다.
얼마 전의 ‘그 일’ 이후 신은 걸핏하면 사자를 친구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했다. 그게 단순히 친근함을 나타내는 의도라면 사자도 그나마 참아 줄만 했을 거다. 문제는 신이 사자만 보면 친구 친구 노래를 부르는 게 사실은 그 말만 들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듯 얼굴을 붉히는 사자를 놀리려는 의도였다는 거다. 사자가 ‘그만 좀 해!’하고 성이라도 내면 신은 크게 상처 받았다는 듯 오버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친구한테 친구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느냐고 울먹거리곤 했다.
그 천연한 표정 뒤에 숨겨진 장난기를 이겨낼 수 없던 사자는 당연히 먼저 지쳐버렸고, 지금은 그나마 나아져 무시라도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거였다. 뭐라고 해 봤자 신이 나서 더 떠들 도깨비의 심보를 잘 알기에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게 나았다. 다시 걸음을 떼려는 사자를 이번엔 덕화가 붙잡았다.
“끝방 삼촌, 잠깐만요!”
다급하게 사자를 부른 덕화가 신이 앉아있는 소파를 거의 허들처럼 뛰어넘었다. 묘기를 보여주려고 붙잡은 건가? 사자가 의문스러워하는 사이 덕화의 손이 거실 벽에 붙은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불이 꺼지자 이번에도 같은 자세로 소파를 뛰어넘은 덕화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트리 끝에 매달려있던 전선의 스위치를 누르기 직전 신과 사자를 돌아보며 입으로 요란스러운 드럼 소리 같은 걸 흉내 내기도 했다.
덕화가 동그란 버튼을 탁 소리가 나게 한번 누르자 트리 위로 칭칭 감겨있던 전구가 동시에 환한 빛을 냈다. 좀 낭만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꼭 나무 위에서 번쩍번쩍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고, 전지적 저승사자 시점에서 표현하자면 불 붙은 성황당 같았다. 감상이야 어쨌든 트리를 만든 장본인인 덕화는 제 결과물에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도 흥얼흥얼 따라했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같은 가사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 노래였다.
“And a happy new year.”
텔레비전에 나오던 어느 팝페라 가수를 흉내 내는 덕화의 목소리로 노래가 끝이 났다. 덕화는 성황리에 공연을 마친 사람처럼 양 손을 살짝 굽힌 채 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건 분명 쏟아질 박수를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다리를 꼬고 공연을 감상하던 소파 1열의 도깨비가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만 까딱거려 심드렁하게 거실 조명을 밝히는 걸 기대했던 건 절대로 아니었다. 무표정한 거실 스탠딩석 저승사자가 ‘봤으니까 이제 됐지?’하고 무심하게 나가려는 걸 기대한 건 더더욱 아니었고. 덕화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내리며 말했다.
“아 진짜 이 삼촌들! 오래 살아가지고 감성이 메말랐어, 감성이!”
“넌 도깨비랑 저승사자 사는 집에서 크리스마스 같은 걸 챙길 마음이 드냐? 하늘이 무섭지도 않어?”
덕화의 볼멘소리에 답하는 신의 말투가 꼭 할아버지 같았다. 살아온 날을 따지자면 할아버지가 뭐야, 거의 대조상뻘이니 그런 말투가 어색할 일도 아니긴 했다. 도깨비가 할아버지라면 덕화는 딱 철딱서니 없는 손자였다. 그는 ‘삼촌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하고 투정을 부렸지만, 삼촌이 아니라 할아버지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칭얼거리는 꼴이 딱 그랬다.
“크리스마스가 뭐 종교의 문제야? 요즘 같은 시대엔 종교를 떠나서 세계인의 축제라고. 난 원래 석가탄신일엔 절밥 먹고 크리스마스엔 교회 가서 달란트 받고 그랬어.”
“자랑이다, 아주.”
덕화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몸소 종교대통합의 장을 이룩했다는 걸 도깨비와 저승사자의 앞에서 아주 떳떳하게도 밝혔다. 저런 걸 가신이라고 두고 있다니. 혀를 차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신을 덕화는 아마 못 본 것 같았다. 대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퉁겼다. 덕화가 허리를 숙여 트리 장식품들을 챙겨왔던 상자를 뒤적거렸다. 찾는 게 있는지 상자 안에서 한참 손을 휘젓던 그가 마침내 허리를 폈을 때엔 작은 카드 같은 게 손에 들려있었다. 덕화는 그 카드를 신과 사자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이게 뭔지 궁금하냐고 물었다. 놀랍도록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던 도깨비와 저승사자에게선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덕화는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스스로 답을 꺼내 놓았다.
“크리스마스 카드예요. 산타 할아버지한테 받고 싶은 선물 적는-”
덕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의 손에 들려있던 카드가 거실 구석으로 휙 날아갔다. 어찌나 힘을 주고 던졌는지 그가 앉아있던 소파 끝이 덜렁 들릴 정도였다. 신이 팔을 휘둘렀던 쪽의 어깨를 두어 바퀴 돌리며 한심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애냐?”
“웅! 삼촌에 비하면 한창 자라나는 스물 다섯 짤이거든!”
어쩐지 이응 발음이 과하게 둥글려지고, 시옷 발음이 혀 짧은 소리로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신은 이제 아주 징그럽다는 표정으로 덕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아직 산타를 믿는다고? 스물 다섯 짤이나 돼서?!”
제 말투를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는 신을 향해 덕화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방금까지 유치원생인가 싶게 부자연스러운 발음을 구사하던 그는 이번엔 정반대로 삶에 찌든 청년의 목소리를 냈다.
“내가 이 나이에 산타를 믿겠어? 당연히 안 믿지?”
“그럼 이 카드는 뭐야.”
“산타가 아니라 삼촌을 믿는 거지, 나는.”
나한테 산타가 왜 필요해? 금은보화 뚝딱 만들어주는 도깨비 삼촌이 있는데? 덕화는 그렇게 말하며 헤헤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티없이 맑아서 산타의 존재보다 도깨비의 금은보화를 믿는다는 말을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모습에 말같잖은 소리를 한다며 호통을 칠 줄 알았던 신은 어리광을 부리듯 제 한쪽 팔에 매달려오는 덕화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마주 웃어주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사자는 그 뒤에 서서 그들이 마주 보고 방싯방싯 웃어대는 걸 가만 지켜봤다. 분명 웃고 있는데 좀 소름 끼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지. 하하하하. 공허한 웃음 소리 뒤로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져 갈 때 덕화를 향해 웃던 도깨비가 정색을 하며 미소를 지웠다.
“나 너 선물 안 사줄 건데.”
“아, 왜애! 나 선물 받고 싶은 거 있어어!”
“내가 네 산타야? 차라리 할아버지한테 사달라고 해.”
“우리 할아버지 내 카드까지 뺏어간 거 몰라서 그래? 내가 카드만 있었어도 삼촌한테 이런 말 안 했다, 진짜!”
“네가 잘했어 봐. 카드 뺏길 일도 없었지.”
“진짜 이러기야? 하나밖에 없는 삼촌이 크리스마스 선물도 안 해주냐?!”
“네 삼촌이 왜 하나야. 너 끝방 사는 삼촌 하나 더 생겼잖아. 쟤한테 달라 그래.”
말싸움의 불똥이 난데없는 곳으로 튀었다. 사자는 눈을 크게 뜨며 저를 향하는 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 내 얘기 하는 거야?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는 사자의 말에 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마 정말 나한테 선물을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덕화의 얼굴을 살폈다. 걱정과 다르게 덕화는 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삼촌. 삼촌은 진짜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덕화의 목소리가 화라도 난 것처럼 가라앉아있어서 말을 꺼냈던 신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자신이 무슨 큰 실수라도 했나 싶을 정도였다. 곧장 말을 잇는 덕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게 울렸다.
“내가, 이 재벌 3세 유덕화가,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연명하는 공무원한테 선물을 받아내야겠어?”
뭐, 쥐꼬리? 덕화의 말을 들은 사자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나 그 정도로 양심 없진 않다, 삼촌."
말을 마친 덕화의 얼굴 위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의 사명감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덕화의 입장에선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도덕적 가치를 확립하는 귀족이고, 사자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보살핌을 받아야 할 서민이라는 소리 되시겠다.
참아줄 수가 없군. 사자는 어금니를 깨물며 신고 있던 슬리퍼 한 짝을 내던졌다. 허공을 가른 슬리퍼가 정확히 덕화의 뒤통수를 맞히고 떨어졌다.
“덕화야. 내가 너 데려가면 도깨비가 노잣돈 두둑이 챙겨줄 거야, 그치?”
듣기만 해도 살벌한 말을 뱉는 사자의 말투에 어조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오싹한 걸지도. 사자의 냉랭한 기세에 덕화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자기 딴에는 끝방 삼촌이 그만큼 내 삼촌 같아서 한 소리라고, 별로 믿기지도 않는 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는 덕화를 향해 사자의 냉기는 더욱 뾰족해졌다. 이러다 일 나겠네 싶어 덕화가 울상을 지으며 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신은 에휴, 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네가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게 뭔데?”
신의 말 한마디에 금방 분위기가 환기됐다. 덕화는 쭈글거리고 있었던 게 언제라는 듯 눈을 빛내며 답했다. 갖고 싶은 물건을 2억5천만 개쯤 말할 것 같은 눈이었다.
“삼촌 나 얼마 전에 새로 나온 스포츠카-”
“미쳤냐?”
“요즘 그 차 정도는 몰고 나가줘야 여자들한테 먹힌다고!”
“어허! 선물의 뜻이 불경하도다!”
“아, 사줘억!”
덕화가 떼를 쓰며 소파 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디선가 본 듯한 광경이었다. 사자는 얼마 전 티브이에서 봤던 방송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말 안 듣는 아이들의 습관을 개선 시키는 목적의 프로였다. 거기에 나오는 아이들이 대부분 저렇게 떼를 쓰며 울었다. 아이가 그렇게 울 때면 근엄하게 생긴 전문가가 들어와 요동치는 아이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안 돼, 라고. 사자는 아마 도깨비도 그 프로그램을 봤더라면 덕화에게 안 돼, 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약해져 ‘그게 대체 얼만데’라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별로 안 비싸. 삼촌 재산에 비하자면 뭐 새 발의 피지.”
못내 한 풀 꺾인 듯 보이는 신의 태도에 덕화는 금방 신이 나서 엉겨 붙었다. 역시 삼촌 밖에 없다는 둥, 사랑한다는 둥, 닭살스러운 말을 서슴지 않더니 이번엔 사자를 보며 말했다.
“끝방 삼촌도 우리 삼촌한테 뭐 하나 사달라고 해요. 친구도 먹었는데 선물은 받아야죠. 돈 많은 도깨비 이럴 때 써먹어야지, 언제 써먹어요."
“뭐, 써먹어?”
신이 제 한쪽 어깨에 붙어있는 덕화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 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말본새가 진짜…!”
오늘 아주 혼을 내야겠다는 신에게 덕화의 양쪽 귀가 모두 붙잡혔다. 그의 고개가 신의 손짓에 솜 빠진 인형처럼 짤짤 흔들리는 것을 보던 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선물 받겠다는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왜 지들끼리 싸운담.
“됐어. 난 어차피 선물 받지도 못 해.”
“왜요?”
여전히 신에게 붙잡혀 고개가 흔들리던 덕화가 간신히 물었다. 사자는 짧고 명료하게 답했다.
“부정청탁 금지.”
“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대답이었다. 그 황당한 대답에 덕화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핑계로 신에게 붙잡힌 제 얼굴을 빼낼 심산도 있었고. 신은 못 이기는 척 붙잡고 있던 덕화의 귀를 놓아주었다.
“부정청탁 금지? 저승에도 그런 게 있어요?”
“어. 이승 사람들한테 선물 받는 건 금지야.”
“와. 김영란법이야, 뭐야.”
덕화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신도 그 반응에 보태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놀라운데.”
“그치? 삼촌도 놀랍지?”
“어. 네가 김영란법을 안다는 게 놀랍다, 정말. 요즘 뉴스 보냐?”
저를 무시하는 뜻이 다분히 담긴 신의 말에 덕화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뿌듯한 듯 웃어 보였다. 뉴스가 아니라 얼마 전에 본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게 퀴즈로 나오더라는 말을 참 구김살 없이 밝은 얼굴로 설명했다. 안 봐서 그렇지 한번 보면 또 기억은 잘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런 걸 보면 덕화는 정말 영혼이 맑은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본의 아니게 저의 유식함이 드러난 게 부끄러운지 머쓱하게 웃는 덕화의 뒷머리 위로 신의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쓰다듬는 것도 같고, 때리는 것도 같은 묘한 손동작이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손길로 덕화의 머리칼을 한껏 쓰다듬어준 도깨비가 문득 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 근데 진짜 선물 못 받냐?”
“어. 내가 계약서에도 쓴 것 같은데.”
“그랬나.”
계약서에 그런 게 있었나. 신은 하도 많아서 잘 기억도 안 나는 항목들을 되짚어 올라가다가 곧 관둬버렸다. 그게 계약서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저승 참 치사하네. 선물도 못 받게 하고.”
“왜. 나한테 선물 주고 싶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마음만 줘.”
무심하게 흘리듯 뱉은 사자의 말에 그를 향하던 신의 고개가 조금 삐딱해졌다. 사자가 한 말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눈 그대로 사자의 얼굴을 빤히 보며 되묻는 게 아닌가. 입이 아니라 속말로.
'마음을 달라고?'
사자는 제가 한 말이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 것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사자가 먼저 한 말이긴 했지만, 도깨비가 말하는 저런 의미가 아니었다. 보통 누가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마음만 달라며 거절을 할 때가 있지 않은가. 정중하고 상냥한 표현이며, 누구에게나 의미가 잘 전달될 상투적인 대답. 분명 그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도깨비는 그 명확한 의미를 왜 똑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런 표정에, 저런 뉘앙스로 되묻느냔 말이다. 그냥 남들처럼 있는 그대로 가볍게 들어줄 순 없는 건가.
도깨비의 뜨겁고 집요한 시선에 사자는 눈을 돌려버렸다. 마침 자신이 방 밖으로 나왔던 목적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나 세탁소 간다.”
급하게 말하며 현관으로 향하는 사자의 뒤로 신의 목소리가 얄밉도록 경쾌히 울렸다. 잘 갔다 와, 친구.
사자가 다니는 세탁소는 누구나 다닐 수 있는 평범한 길에, 평범한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세탁소처럼 보였지만, 사실 보이는 것처럼 평범한 곳은 아니었다. 평소엔 여느 세탁소와 다르지 않았다. 장사가 잘 되지는 않지만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세탁물을 받고, 가까운 곳은 직접 배달도 했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자가 혼자 운영하는 세탁소라 마감 시간이 이르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그것을 빼고는 문제랄 게 없는 세탁소였다. 딱, 오후 네 시부터 다섯 시 사이엔 이용할 수 없다는 것만 빼고.
그 시간이 오면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세탁소는 조금 특별해졌다. 건물 주위로 큰 물방울 같은 장막이 쳐지면 산 사람들은 그 길을 지나다니면서도 세탁소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세탁소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지만, 그냥 볼 수 없게 되는 거다. 삶이 남은 자들은 느끼지 못하는 저승의 시간이 바로 그 곳에서 흘렀다. 그 순간 세탁소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건 저승을 오가는 저승사자뿐이었다.
그러니까 이 세탁소는 이승과 저승의 시공간이 맞물려 흐르는 유일한 곳인 셈이었다. 사자로서는 중요한 업무 아이템까지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니 이 곳의 의미가 꽤 클 수밖에 없었다. 나름 업무상의 비밀이라면 비밀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 신성한 곳을, 감히, 미행을 해?
세탁소 문을 넘기 직전 사자의 발이 우뚝 멈췄다.
"죽을래?"
사자는 몸을 돌려 제 앞에서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깨비를 바라봤다. 그는 사자가 자신을 발견할 줄 몰랐는지 꽤 당황스러워 보였다. 갑작스러운 발각에 미처 몸을 숨기지도, 능력을 쓰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포즈로 말을 더듬거렸다.
“야, 너, 너는 저승사자가 그런 말을 막 서슴없이…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거 좀 진심같이 들린다, 너?”
“어디 한번 진심으로 그렇게 만들어줘? 도깨비 신부고 뭐고 나랑 피 터지게 싸우다가 이 생 마감하게 해줄까?”
험악하기 그지없는 사자의 말에 신은 인상을 찌푸렸다. 생긴 건 안 그런 게 말은 어쩜 그렇게 거친지. 저승사자 노릇을 하며 온갖 험한 꼴을 다 보며 살아온 것이 말투에 스며든 건가.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자가 하루 종일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산다고 해도 이해할 만한 일이긴 했지만, 꼭 주인 품에서 잘 자란 강아지 같이 순한 눈망울을 가진 그의 외모에 썩 잘 어울리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을 그대로 전했다간 사자의 입에서 진정 육두문자를 들을 것만 같아 신은 항복 선언을 하듯 제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일 뿐이었다. 그 깔끔한 항복의 제스처에도 사자는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너 나 세탁소 간다고 할 때마다 이렇게 따라올 거야?”
“내가 뭘 따라왔다고-”
“자꾸 이러면 그 기타 누락자 내가 진짜 상부에 이름 올려서 데리고 가버리는 수가 있어.”
짐짓 굳은 표정으로 하는 사자의 말에 신이 저 나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펄쩍 뛰었다.
“나도 세탁물 맡길 거 있어서 온 거야!”
텅 빈 양 손을 흔들어대면서 그런 말을 잘도 지껄인다 이거지.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에 사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을 향해 턱짓을 했다. 어디 그 세탁물이라는 걸 내보여 보라는 뜻이었다.
당황한 신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필 겉옷도 제대로 챙겨 나오지 않아 입고 있는 거라곤 얇은 스웨터 한 장뿐이었다. 그렇다고 바지를 벗을 수는 없어 스웨터 끝자락을 쥐고 꼼지락거렸더니 사자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지금 여기서 그걸 벗겠다는 거냐?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에 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신발을 벗더니 그 안에 신고 있던 하얀색 양말을 휙휙 벗었다. 그리곤 그걸 사자의 얼굴 앞에 당당하게 들이미는 것이다. 사자는 기겁을 하며 신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더러운 쓰레기라도 본 표정이었다. 차라리 쓰레기가 더 낫겠다 싶은 얼굴이기도 했다. 신은 그런 사자를 놀리듯 손에 들린 양말을 슬렁슬렁 흔들며 여유롭게 말했다.
“양말 맡기러 왔어.”
“미쳤냐? 누가 양말 한 켤레 맡기겠다고 세탁소를 와?!”
“내 맘이야. 이 세탁소가 네 거야? 내가 내 양말 맡기겠다는데.”
이 세탁소가 사자의 것은 아니었지만 사자 전용이긴 했다. 도깨비 같은 놈이 마음대로 드나들어선 안 되는 그런 세탁소라고! 사자가 미처 그 말을 하기도 전에 그를 지나친 신이 세탁소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서 다림질을 하고 있던 푸근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다소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양말 한 켤레를 흔들며 들어오는 신을 남자는 경계의 눈빛을 담고 바라봤다. ‘누구…?’하고 어물어물 묻는 물음에도 조심스러움이 뱄다. 신이 ‘세탁물을 좀 맡기러 왔는데요’하고 양말 두 짝을 정중히 내밀 때까지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는 그의 뒤로 보이는 사자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표정을 풀었다. 신의 등장으로 심기가 불편해져 양 볼이 퉁퉁 불어있던 사자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눈인사를 했다. 중년 남자는 그제야 좀 마음 편하게 웃어 보였다.
“오셨어요. 처음 뵙는 분이 들어와서 깜짝 놀랐는데, 함께 오신 분이었군요.”
인상만큼이나 인자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사자와 신을 번갈아 바라봤다. 처음으로 일행을 데려온 사자에게 뭔가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답게 말을 아끼는 법을 아는 사람 같았다.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사자는 그 분위기가 낯설고도 불편해 신이 남자에게 양말을 건네줌과 동시에 말했다.
“맡겼으면 가.”
신은 사자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남자에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이 양말이 이태리 유명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양말이라며, 울 소재가 포함되어 있어 보온성이 뛰어나고, 그만큼 세탁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둥, 대체 누가 그런 양말을 신나 싶은 믿기지 않는 말만 줄줄 읊었다. 아무리 들어도 시답잖은 말이었다. 듣다 못한 사자가 그의 말을 자르며 다시 말했다.
“안 가?”
말이 끊긴 신이 입맛을 쩝 다시며 답했다.
“가.”
“잘 가.”
“어.”
사자의 성화에 못 이긴 신이 몸을 돌렸다. 사자는 그제야 자신이 맡기러 온 모자를 중년 남자의 앞에 내밀었다. 남자는 익숙하게 모자를 받아 들었다. 그가 모자 전용 옷걸이를 꺼내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걸 보던 사자가 아직 제 뒤에서 느껴지는 눈길에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가라고.”
“가, 간다고!”
“가라니까?”
“간다니까!”
신이 괜한 성을 내며 세탁소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사자를 향해 더럽게 까칠하게 구네 어쩌네 하며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사자가 획 고개를 돌려 그가 나간 문을 노려봤다. 자기 멋대로 따라와놓고 왜 지가 성질인가 싶었다. 화를 내야 하는 쪽은 엄연히 사자 쪽이었다.
사실 신이 이 세탁소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이 장소를 굳이 알릴 생각도 없었지만, 알았다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도깨비가 여기 좀 알았기로서니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런 건 상관없었지만, 진짜 싫은 건 따로 있었다. 그가 자신을 미행했다는 거. 그러니까, 사자가 세탁소를 핑계로 도깨비 신부에게 찾아가기라도 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저를 따라왔을 도깨비가 못마땅한 거였다.
기타 누락자는 사자에게 분명 신경 쓰이는 존재이긴 했다. 특히 연말이 되면 더 그랬다. 연말마다 연간 업무 일지를 작성해서 올려야 하는데 그때마다 누락된 망자에 대한 보고서를 만드는 건 만만찮은 일이었다. 기타 누락자를 당장 데리고 가겠다고 서류를 만드는 것도 까다로운 일이지만, 연말마다 그 일을 반복하는 것 역시 귀찮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자가 도깨비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이상 도깨비 신부를 맘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깨비와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사실은 인도적 차원의 뜻이 더 컸다. 어쨌든 도깨비의 생이 달린 문제를 저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사자에겐 좀 피곤하고 말고의 일이었지만, 도깨비에겐 일생이 달린 일이 아닌가. 도깨비의 앞에선 신부를 찾았으면 당장 검을 뽑아 버리라고 가볍게 얘기하곤 했지만 사실 그리 쉽게 결정지을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가 좀 피곤하더라도 기타 누락자 일은 일단 덮어두자, 그렇게 생각했던 거였다.
그런데, 도깨비 놈은 그런 자신을 자꾸 의심하고 뒤를 밟아? 사자가 성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자 신이 나간 세탁소 문에 성에가 맺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년 남자가 난감한 목소리로 차사님, 하고 그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기어이 문짝의 유리를 깨버렸을지도 모른다. 사자가 황급히 눈빛을 풀며 남자를 돌아봤다.
“아, 죄송합니다.”
남자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는 사자의 모자를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친구 분이신가 봅니다.”
사자는 이 곳 사람들은 ‘친구’라는 말을 참 광범위하게, 여럿에게 쓰나 보다 생각했다. 아니면 도깨비와 자신이 누가 봐도 친구처럼 보이는 건지. 우리가 정말 그만큼 가까워 보이는 건가. 사자는 사실 여전히 신과 자신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게 아리송한데, 그들의 사이를 처음 본 남자가 친구냐고 묻기까지 하는 걸 보니 우리가 정말 친구처럼 보이나 싶었다.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콧잔등을 긁적인 사자가 말을 돌렸다.
“그 종이는 뭐예요?”
남자가 사자의 모자 위에 날짜와 시간을 적은 쪽지를 붙이는 걸 보고 한 말이었다. 이 세탁소에 자주 왔었지만 저런 쪽지를 붙이는 건 처음 봤다. 워낙 이 일을 오래해서 그런 걸 붙여 표시하지 않고도 모양이 조금씩 다른 차사들의 모자를 잘 찾아주는 남자였다. 사자가 의아해하자 그는 조금 곤란한 표정이 됐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실 요즘 차사님들 모자가 뒤죽박죽이 되는 일이 있어서요.”
“모자가요?”
“예.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안에서 소리가 나서 올라가 보면 잘 정리해뒀던 모자들이 난리가 나있기도 하고… 혹시 없어지기라도 할까 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자의 모자는 아무나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질 수 있다 해도 사람의 손이 닿으면 그 뒤를 감당하기가 힘들 텐데. 사람이 아닌 건가? 귀신? 요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며칠 됐어요.”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제가 더 신경 써야 할 일인데….”
“뭘요. 이 모자는 저희한테도 중요한 건데요. 모자는 며칠 뒤에 찾으러 올게요.”
살짝 묵례하듯 고개를 숙이며 문 손잡이를 미는 사자를 향해 남자가 습관처럼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세탁소를 오가던 다른 손님들에게 해주던 인사인 모양이었다. 그게 입버릇처럼 툭 튀어나온 것에 남자가 순간 텁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자가 얼떨떨하게 돌아보자 그는 까슬하게 수염이 올라온 제 턱을 슬쩍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아, 크리스마스 같은 건 안 챙기시겠죠.”
안 챙기기는 했으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굳이 남자에게 듣지 않더라도 어디서나 들려오는 말이었다. 300년 동안 하도 들어서 그런지 이제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본래 뜻보다 그냥 이맘때면 아무렇지 않게 주고 받는 인사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는 이제 세계인의 축제라고 열변을 토하던 덕화의 말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사자는 아직 붙잡고 있던 손잡이를 마저 열며 말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세요.”
밖으로 나오자 어딘가에서 캐롤이 들려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캐롤의 종류가 바뀌었다. 가게마다 각기 다른 캐롤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포들은 꼭 이 시즌을 위해 1년을 벼르고 있었던 것처럼 온갖 장식품으로 외관을 꾸미고 ‘메리 크리스마스’같은 문구를 대문짝만 하게 붙여 놓았다. 그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연말이면 꼭 보이는 구세군 함마저 붉은색이었다. 어쩌면 그 색깔이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사자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느닷없이 어느 상점에 들어선 것을.
“어서오세요.”
홀로 가게를 지키고 있던 젊은 여자가 나긋하게 인사를 걸어왔다. 사자는 어색하게 응대하며 내부를 둘러봤다. 그냥 작은 팬시점인 줄 알고 들어섰던 가게는 독특한 디자인의 장식품들이 꽤 많았다. 개인 디자인 숍인가. 생전 처음 보는 것들에 눈이 휘둥그레진 사자가 그냥 나갈까 망설이는 사이 여자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이런 곳엔 생전 처음 와봤다는 티가 팍팍 나는 사자를 향해 서비스 마인드로 똘똘 뭉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리스마스 선물 사시려구요?”
이 시즌에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대부분이 그 목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 그녀가 당연하게 묻는 말에 사자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오!”
손바닥을 펼쳐 호들갑스럽게 휘젓는 사자의 모습에 잘 훈련된 그녀의 미소가 살짝 어색해졌다. 하지만 프로 정신이 투철한 여자는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럼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그러게요. 제가 뭐가 필요한 게 있을까요.”
사자는 중얼거리며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특별한 목적도 없어 보이고, 구매 의욕은 더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여자는 사자의 그 태도와 딱 두 마디 섞은 것으로 그를 진상 손님이라 판단한 모양인지 더는 말을 시키지 않았다. 처음의 적극적인 자세는 어디로 가고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뭐든 조용히 구경이나 하다가 가라는 태도가 명백했다. 덕분에 사자는 차라리 편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구경할 수 있었다.
가게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수제품처럼 보였다. 모든 물건이 딱 한 세트밖에 없는 것도 그렇고, 손으로 다루지 않으면 까다로울 것 같은 가죽 제품들도 많았다.
사자는 가죽 끈을 얽어 에펠탑을 닮게 만든 장식품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서 이렇게 세운 걸까. 신기하게 보며 옆으로 한걸음 옮기자 그의 머리 위에서 모빌이 살랑 흔들렸다. 아주 얇은 은사 끝에 점토로 만든 새들이 매달려 있었다. 어떤 것들은 날개를 펼치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어딘가에 앉아있는 듯 몸을 말고 있었다. 그것들이 서로 부딪히면 실이 엉키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런 것도 나름의 요령으로 잘 만들어진 모양인지 새들은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신에 짤랑짤랑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었다.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좀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사자가 눈을 내렸을 때 그의 시선을 잡아당긴 물건이 하나 있었다.
검이다. 아니. 검처럼 생겼다. 그는 허리를 숙여 유리 진열장 안에 검처럼 보이는 그 물건을 빤히 들여다봤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아랫부분이 검처럼 뾰족하고 표면에 가죽 특유의 광택이 살아있었다. 가운데엔 세로로 긴 선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그게 꼭 검 가운데에 솟은 배 부분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긴 화살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자의 손가락보다 조금 더 길 것 같은 그것의 네모진 상단엔 동그란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그 안을 얇은 가죽 끈이 통과해 긴 줄처럼 늘어졌고 그 끝엔 눈송이 같은 테슬이 달려있었다. 사자의 손가락이 유리 위를 콕 건드렸다.
“이게 뭐예요?”
사자의 말에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던 여자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사자가 보고 있는 것을 힐긋거리곤 북마크라고 답했다. 북마크? 중얼거리는 사자에게 여자가 다시 말했다. 책갈피요. 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보려고 했지만 이어서 나오는 사자의 말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거 한 세트 주세요.”
사자가 물건을 살 거라고 예상 못했던 건지 여자가 뜻밖의 횡재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다시 프로 정신을 발휘해 사자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했다. 천연 가죽으로 만들어진 거라 고급스럽고 책 사이에 끼웠을 때 끝에 살짝 나온 테슬이 너무 앙증맞은 제품이라고. 그러며 사자의 눈앞에서 그걸 굳이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사자는 앙증맞다는 그녀의 표현이 썩 달갑지 않아 그냥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사자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자는 더 설명하기를 멈추고 총 다섯 개의 북마크 한 세트를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선물 포장을 할 거냐고 물었다. 사자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렇게 해달라고 답했다. 단지 저렇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대로 들고 가는 게 좀 불편할 것 같아서 그런 거였다. 여자는 은은한 금색의 포장지로 상자를 감쌌다. 여자가 능숙한 솜씨로 포장을 하는 걸 가만 지켜보던 사자는 그녀가 포장의 마지막 단계에 작은 리본 같은 걸 붙이려는 모습을 보고 막아 세웠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불행하게도 사자의 말보다 그녀의 손이 더 빨랐고, 작은 리본은 이미 포장이 끝난 상자 위에 떡하니 붙은 후였다. 여자가 새삼 자신의 포장 실력에 감탄한 듯한 얼굴로 뿌듯하게 내미는 것을 사자는 말없이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사자는 그녀에게 가격을 지불하고 그 상자를 황급히 코트 안으로 집어 넣었다.
“또 오세요.”
가게를 나서는 순간 여자의 밝은 인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사자는 그 인사를 듣고 나오며 벌써 자신의 소비를 후회할 것만 같았다. 왜 갑자기 이런 걸 사 들고 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홀렸던 게 분명하다. 만나는 사람마다 크리스마스 타령을 하고, 들리는 노래는 죄다 캐롤이라서. 세상이 그를 빼고 온통 크리스마스 맞이를 준비하는 것 같은 그 분위기에 휩쓸려 안 하던 짓을 한 거였다. 평소 쓸데없는 소비를 잘 하지 않는데 생전 처음 디자인 숍이라는 곳에 들어간 건 그런 이유 때문인 게 분명했다. 사자는 역시 크리스마스랑 저는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순식간에 시끌벅적하던 거리가 사라지고 집 앞 현관에 다다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은 조용했다. 덕화가 남겨 놓고 간 정신 사나운 트리가 혼자 번쩍거리고 있었다. 덕화야 집에 갔다 치고, 도깨비는 어디 갔지? 생각하는데 사자의 등 뒤에서 도깨비가 부스럭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너 왜 이제 들어와?”
그는 분명 사자보다 먼저 세탁소를 나갔다. 그런데도 사자보다 늦게 들어왔다. 사자의 눈이 이번엔 날카로워지기까지 했다. 그 의심 가득한 눈빛에 신이 뭐,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 아까 세탁소 나와서도 나 따라다녔어?”
“뭐래. 아까 지가 그렇게 가라고 소리를 질러 놓고.”
“또 나 미행했지?”
“미행은 무슨 미행이야.”
“그럼 왜 이제 오냐고.”
아무래도 전적이 있는 도깨비라 사자의 의심은 금방 풀리지 않았다. 신은 대체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이제 들어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냐는 신의 말에 사자가 바락 성을 냈다.
“미행 했네, 했어!”
“아, 맥주 사왔다, 맥주!”
신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정색 봉지를 사자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아까 신이 들어올 때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아마 이 봉지였나 보다. 봉지의 열린 틈으로 살짝 보이는 맥주 캔에 사자의 손이 제 뒷목으로 올라갔다. 그래? 하고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사자를 향해 신이 일부러 발을 쿵쿵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거칠게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캔을 집어넣는 그의 태도가 아주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당당했다.
“나랑 친구 맺더니 아주 내가 지만 보고 있는 줄 알어! 아까 세탁소만 해도 그래. 내가 분명히 세탁물 맡기러 간 거라고 해도 지 따라온 거라고 그렇게 열을 내고 말이야.”
그건 네가 진짜 나 따라온 거잖아! 사자가 반박하려는데 신은 그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어디 갔는지는 또 뭐가 그렇게 궁금해?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야겠어? 너 그거 구속이고 집착이야, 알어? 친구끼리 그렇게 집착하면 서로 지치고-”
주절주절 떠드는 도깨비의 말을 더는 견뎌줄 수 없었다. 사자는 그의 외침을 무시하고 제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문 밖에서 사자에게 들으란 듯이 크게 소리치는 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 그렇게 집착하면 나 진짜 피곤해진다!”
사자는 문 뒤에 등을 기대고 제 코트 안에서 잡히는 상자를 꽉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론 제 머리를 뜯었다. 내가 저런 자를 주려고 선물을 사다니. 미쳤지, 미쳤어.
마침내 다가온 대망의 크리스마스 이브, 그날 이것저것 계획이 많았던 덕화는 아침 일찍 전화 한 통을 받고 자신의 하루가 산산조각이 났다는 걸 깨달았다. 전화를 건 것은 그의 할아버지였고, 할아버지는 덕화에게 오늘 하루 종일 나으리를 모시라는 명을 내린 거다. 그 절망적인 얘기에 덕화는 반항의 의미로 조금 난리를 쳐봤지만 도망가면 카드는 평생 없을 줄 알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결국 아침부터 도깨비 하우스를 찾은 덕화는 비록 홀애비 냄새 나는 집안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라도 잔뜩 내고 싶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파티를 준비한 결과가, 지금 이 꼴이었다.
“너 대체 내 집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신은 난장판이 된 거실 꼴을 둘러봤다. 천장엔 아기 천사의 형상을 한 가랜드가 미적 감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지그재그 형태로 달려 있었고, 노랗고, 빨갛고, 파란 풍선들은 조잡하게 바닥을 굴러다녔다. 얼마 전 꾸며뒀던 트리는 이것 저것 장식을 더해 나무가 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저렇게 두니 진정한 성황당으로 거듭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참혹한 결과의 주범인 덕화는 제가 한 짓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 하는 듯 해맑게 웃으며 나타났다. ‘짠!’하고 모습을 드러낸 그의 양쪽 귀에 천장에 달려 있어야 할 파티볼이 귀걸이처럼 붙어있었다.
“이렇게 꾸며 놓으니까 산뜻하지? 역시 이런 날을 그냥 보내면 섭섭하다니까. 이래야 기분이 좀 살지.”
대체 어디가 산뜻하고, 어떻게 기분이 산다는 걸까. 도깨비는 염력을 사용해 온 집안에 붙어있는 것들을 다 떼버리고 싶었으나 그것마저도 피곤하게 느껴졌다.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 드는 신을 향해 덕화가 그 책은 며칠째 읽는 거냐며 깐족거렸다. 신은 이번엔 염력을 쓰는 걸 망설이지 않고 허공에서 덕화의 머리통을 때렸다. 덕화의 몸이 앞으로 고꾸러졌다. 아프다고 우는 소리를 내며 뒤통수를 문지르던 덕화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앉아있는 신의 뒤로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는 사자의 모습이 보였다.
“어? 끝방 삼촌 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 아침 덕화가 집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집을 나서려던 사자와 마주쳤었다. 오늘 집에서라도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거라고 의지를 불태우는 덕화에게 그는 자신은 좀 늦을 거라고 답했었다. 연말이라 일이 많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그 말을 듣고 남들 놀 때 놀지 못하는 걸 보면 저승사자 일도 참 못할 짓이구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을 가졌던 덕화는 초저녁에 모습을 드러낸 사자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사자는 일이 일찍 끝난 거냐고 묻는 덕화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있는 사자의 곁으로 덕화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승사자도 연말 즐기라고 일찍 일 끝내주고 그래요?”
덕화의 시답잖은 말에 평소라면 한마디 쏘아 붙일 사자가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끝방 삼촌 어디 아파요?”
어딘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영 힘이 없어 보이는 게 진짜 아픈 건가 싶기도 하고. 덕화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신을 돌아보자 그도 이미 사자를 신경 쓰고 있는지 엎어져 있는 사자의 뒤통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덕화가 손짓 눈짓을 동원해 ‘끝방 삼촌 왜 이래?’라고 묻는 것을 곁눈질로 보던 신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곧이어 헉, 하는 단말마의 신음 같은 것도 터져 나왔다. 덕화가 왜왜왜? 하고 묻는 것에 그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세상에. 모자를 잃어버려? 그거 잃어버리면 일도 못 하는데?”
신이 혀를 차며 하는 말을 덕화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도깨비와 저승사자가 속으로 주고받는 말을 사람인 덕화가 알아들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덕화가 성을 내며 무슨 소리냐고 보채자 신이 모자를 잃어버렸다잖아, 하고 귀찮은 듯 답했다.
“그거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데? 중요한 거야?”
“중요한 거지. 저승사자의 필수 아이템이거든.”
“헐. 그럼 끝방 삼촌 이제 짤려? 저승사자 일 못 하는 거-”
말을 다 마치지 못한 덕화가 또 한번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번엔 신이 아니라 사자의 짓이었다. 그는 얼굴을 박고 있던 쿠션 위에서 슬쩍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안 짤려. 다시 받을 수 있어.”
“그럼 된 거지. 왜 그렇게 저기압이야?”
짤리지도 않고 재발급도 가능한 거면 걱정할 게 없지 않나. 태평하게 말하는 신을 향해 사자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받을 수 있지만 내 돈으로 다시 사야 하고, 사유서도 몇 장 씩 써서 올려야 하고, 모자가 다시 준비되는 동안 일도 못할 테고… 무엇보다 그 사이에 노잣돈도 못 벌고오오!”
사자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는 거의 울부짖을 지경이었다. 다시 얼굴을 박은 사자의 울음이 쿠션에 파묻혀 뭉개졌다.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이런 생각지도 못한 걸로 일을 못하게 되자 그 좌절감이 말도 아니었다.
모자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 건 사자가 모자를 찾기 위해 세탁소에 갔을 때였다. 사자가 아침에 일을 나가기 직전 세탁소를 들르자 늘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하곤 했던 중년의 남자는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발발 떨리는 목소리로 모자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혼자서 그 작은 세탁소를 얼마나 뒤집어 엎었던 건지 내부는 난리통이 되어 있었고, 남자의 이마는 한 여름에 뜀박질을 하고 온 사람처럼 땀이 맺혀있었다. 사자가 놀라서 모자가 없어져요?! 하고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자 그 목소리만으로도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승사자의 모자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걱정스럽겠는가. 사자는 일단 남자를 진정시켰다. 자신은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물론 속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지만 남자에게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꼼꼼하게 일을 하는지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기도 했다.
남자는 사자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오늘 사자가 모자를 찾으러 오는 날이라 미리 빼두려고 위로 올라갔는데 마침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고 했다. 한동안 보관실을 어지럽혔던 그것의 소리 같아서 옳거니, 하고 쫓아 올라갔더니 웬 시커먼 것이 제 앞으로 달려들더란 것이다.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은 이미 세탁소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언뜻 보기에 늑대 같기도 하고, 표범 같기도 했단다. 이런 도심에 늑대가 웬 말이고, 표범이 대체 웬 말이란 말인가. 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그 녀석이 안을 어지럽혀 놓기만 한 건가 싶어서 내부를 정리하는데, 딱 사자의 모자만 없어진 걸 알았다고 했다.
사자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계속 머리를 조아리는 남자를 향해 일단은 괜찮다는 말로 그를 달랬다. 물론 저승사자의 물건을 관리해주는 자로서 위에서도 어떤 책임을 묻기는 하겠지만, 그리 심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자의 말대로라면 늑대 같고 표범 같은 것이 가지고 달아나는 것을 인간인 그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었겠는가.
사자는 그렇게 말하며 남자를 안심시키고 밖으로 나왔으나 막막한 건 사실이었다. 당장 오늘 해야 하는 일도 다른 차사들에게 부탁해야 했고, 오늘뿐 아니라 모자가 나올 때까지 자신에게 잡혀있던 일정들을 모두 조율해야 했다.
오늘 하루를 그걸 해결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으로 보냈다. 하루 종일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돌아다녔더니 집에 오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모자고 뭐고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이대로 잠들고만 싶었다.
그런 사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덕화가 손바닥을 짝 부딪히며 말했다.
“자! 어차피 그렇게 된 거 그냥 다 잊어버리고 크리스마스 파티나 하자.”
지금 이 순간 덕화의 머릿속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인 모양이다. 모든 것의 결론이 크리스마스와 파티로 귀결되는 것을 신은 혀를 차며 바라봤고, 사자는 대꾸도 없었다. 덕화는 사자가 여전히 무기력에 빠져있든 말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 넣어둔 케이크를 꺼냈다. 심지어 제법 큰 사이즈였다. 저걸 누가 다 먹는다고. 덕화는 나무라는 듯한 신의 눈빛을 모르는 척 케이크를 들고 왔다. 그냥 먹자는 것도 아니고 촛불까지 켜야 한단다. 신이 별 걸 다 한다고 성가셔하자 덕화는 케이크가 있는데 촛불은 당연히 붙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어이 초를 꺼낸 덕화는 케이크 위에 세 개의 초를 꽂았다. 왜 세 개냐고 물었더니 저와 신과 사자를 의미하는 거란다. 와중에 자신의 초는 귀엽게 작은 놈으로 꽂는 것을 보고 신은 그냥 웃어버렸다. 성냥으로 불까지 붙인 덕화가 오르내리는 사자의 등을 보며 말을 시켰다.
“끝방 삼촌. 같이 촛불 꺼요.”
사자는 당연하게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 정확히 따지자면 일단 겉으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쿠션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말을 하기가 어려운 사자는 내적 언어를 구사했다. 그걸 알아들은 신이 덕화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쟤 건들지마. 지금 그럴 기분 아니래."
"뭐야. 뭐라고 했어? 둘이 텔레파시로 대화해?"
"어. 너 닥치래."
"아씨!"
"씨?"
"씨~원하게 촛불 끄자고, 촛불."
능청스럽게 웃는 덕화를 향해 신은 손만 휘적거렸다. 촛불은 너 혼자 끄라는 뜻이었다. 덕화는 영 분위기를 맞춰주지 않는 아저씨들을 향해 에휴, 한숨을 쉬고는 결국 저 혼자 초를 불었다. 이래가지곤 도무지 크리스마스 파티라고 할 수가 없었지만 괜찮았다. 덕화가 준비한 하이라이트는 케이크나 촛불이 아니었으니까.
초를 불고 케이크나 먹을 줄 알았던 신은 덕화가 케이크를 거의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걸 보고 얼굴에 물음표를 그렸다. 덕화가 자신의 얼굴 앞으로 손을 내밀어 보이자 그 물음표는 더욱 커졌다.
“뭐야?”
멍하니 바라보는 신을 향해 덕화는 뭘 알면서 그러냐는 듯 말했다.
“선물 주떼요, 산타 삼촌.”
덕화의 혓바닥이 다시 퇴화했다. 선물 얘기만 나오면 어려지는 병에 걸린 건가. 신은 그 뻔뻔한 선물 요구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으나 덕화의 손바닥이 자꾸만 그의 얼굴을 쫓아다녔다. 귀찮다며 손을 휘저어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것에 신은 결국 못 이기는 척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덕화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역시 삼촌! 준비 안 한 것처럼 굴더니 다 준비했었네!”
덕화가 작게 주먹을 말아 쥐고 퍽 아프게 신의 어깨를 쳤다. 선물을 주고도 얻어 맞은 신이 제 어깨를 감쌌다. 덕화는 신에게 받은 상자를 제 귀에 대고 흔들어봤다. 안에서 뭔가 작은 물건이 돌아다니며 툭툭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상자의 사이즈로 보나 소리로 보나 이건 분명 차 키였다. 덕화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도깨비 삼촌이 드디어 저를 위해 진정한 선물을 준비한 것인 게 분명했다. 덕화는 상자를 열어보기도 전에 벌써 감동으로 오열 할 자세를 잡았다. 그의 손이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개봉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것은 작고, 반짝거리고, 한 손에 들어오는….
“이게 뭐야!”
스포츠카였다. 물론 장난감. 손바닥보다도 작은.
“어때. 마음에 드느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덕화를 향해 신은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덕화는 일곱 살 때 이 세상에 산타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보다 더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누가 조카 선물로 이런 걸 사줘! 내가 초딩이어도 안 갖겠다!”
“네 이놈! 무엄하-”
“삼촌이나 가져!”
덕화의 손에 들려있던 장난감 스포츠카가 공중에 내던져졌다. 신은 저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한 손으로 턱 받아냈다. 그는 ‘알다가도 모르겠구나’하고 꿍얼거리며 꽤 기분이 상한 듯한 덕화의 얼굴을 살폈다. 신에게 그 문제의 장난감을 던지고 나서도 분이 안 풀리는지 덕화가 성질을 내며 신을 지나쳤다. 쾅쾅쾅. 그는 대리석 바닥을 부술 기세로 현관으로 향하며 제 처지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 놓았다. 내가 친조카가 아니라서 이러는 거라는 둥, 친조카였으면 절대 이럴 수는 없을 거라는 둥, 삼촌한테 다시는 삼촌 소리를 안 하겠다는 말까지. 듣고 있던 신이 안 되겠는지 뭐라 한마디 하려는 순간 현관문을 열었던 덕화가 갑자기 벼락 같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신이 번쩍 고개를 빼고 현관을 바라봤고, 덕화는 문 앞에서 주저앉아버렸고, 사자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신이 의자에서 일어나 덕화에게 향하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차박차박.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소리 같은 것. 근데 사람의 발소리라고 하기엔 왠지 그 부피가 너무 작고, 소리의 종류가 좀 달랐다. 발톱 같은 게 부딪히는 듯한 이 소리는 뭐지. 신이 그 소리를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서자 문제의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커먼, 개였다. 개. 개라니? 개라고?
“뭐야? 웬 개?”
신이 누구에게 묻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에 한참 우울감으로 젖어가고 있던 사자가 그제야 반응이라는 것을 보였다. 그는 쿠션에 파묻혀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소파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자 덩그러니 서 있는 도깨비의 뒷모습과 또 그 앞에 귀를 쫑긋거리며 서 있는 개가 보였다. 주둥이가 있는 쪽만 하얀 털이 난, 그 외엔 온통 시커먼 개가. 그리고 그 개의 하얀 주둥이에 물려있는 낯익은 모자를 알아본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야, 저승. 저거 네 모자 아니냐?”
신이 모자 얘기를 꺼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그걸 알아차린 사자가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불 난 집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처럼 화다닥 달려온 그는 개의 입에 물린 모자를 뺏으려 곧장 손을 뻗었다. 아마 계획대로라면 무사히 모자를 손에 넣었어야 했을 거다. 사자의 손이 코 앞으로 다가온 순간 개가 컹! 짖어대지만 않았다면.
개의 크기는 사실 강아지라고 불러도 위화감이 없을 만큼 크지 않았으나 컹컹 짖는 소리는 꽤 위협적이어서 깜짝 놀랐다. 사자가 자신의 하얀 손가락을 가슴 앞으로 감싸 모으며 개를 노려보자 개가 계속해서 짖어댔다. 컹컹! 컹컹컹! 그 소리를 가만 듣던 사자의 머리에 문득 스쳐가는 하나의 장면이 있었다. 이 소리를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 같았다. 딱 이렇게 생긴 개가 저를 향해 짖어댔던 걸 경험해본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구체적인 장면을 기억해냈다.
“설마 그때… 그 개야?”
얼마 전 교통사고 현장에 나갔었다.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접촉사고였다. 사고는 꽤 컸으나 사망자는 단 한 명이었다. 앞에서 깜빡이도 안 켜고 난폭하게 끼어드는 차를 피하려다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27세의 여성 운전자였다. 동승인은 없었다. 다만 동승견이 있었다. 뒷좌석에 있었던 개는 몸집이 작은 덕분이었는지 그리 심각하지 않은 찰과상이 다였다. 사자가 여자를 데려가던 순간 여자가 뒤를 돌아 자신의 차에 대고 인사를 했었다. 아마 그 인사는 차가 아니라 개에게 하는 거였나 보다. 손을 흔드는 여자를 데려가는 사자를 향해 끊임없이 짖어대던 그 개가, 바로 저 개였다.
어느새 문 앞에 넘어져 있던 몸을 일으킨 덕화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사자와 개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것을 보며 물었다.
“아는 개예요?”
“본 적은 있어. 얘 주인 데려갈 때.”
사자가 데려간다는 곳이 그리 달가운 곳이 아니라는 걸 안다. 덕화가 꽤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 개가 끝방 삼촌이 자기 주인 데려가는 걸 봤다고요? 그게 가능해요?”
“가끔 볼 수 있는 개들이 있어.”
이승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동물들은 영혼을 볼 수 있다고. 어떻게 보면 그 말이 일부 사실인 거다. 모든 동물이 영혼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볼 수 있는 동물들도 그 정도의 차이가 컸다. 어렴풋하게 형체만 보는 경우도 있었고, 목소리만 듣는 경우, 비교적 또렷하게 영혼을 구분할 만큼 보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인간과 가깝게 지내는 개에게 그런 경우가 많이 나타났는데, 사자가 보기에 이 개는 그보다도 더 특별한 듯했다. 사자가 제 주인을 데려갈 때에도 분명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짖었다. 그리고 지금도 저승사자의 앞에서 겁 하나 먹지 않고 서 있다. 심지어 그 주둥이엔 사자의 모자까지 물려있지 않은가. 보통의 개들은 사자를 이렇게 가깝게 마주하지도 못할뿐더러, 그의 물건이 닿는 것도 싫어했다.
사자의 말에 따르면 꽤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개에게 덕화는 벌써 흥미가 좀 생긴 모양이었다. 쪼그려 앉아 개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며 물었다.
“근데 얘가 왜 여기를 왔지?”
그것도 끝방 삼촌 모자까지 물고. 덕화의 중얼거림에 사자 대신 신이 입을 열었다.
“자기 주인 데리고 간 저승사자 찾으러 왔겠지.”
신은 그렇게 말하며 생각에 잠긴 사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사자는 오늘 세탁소에 들은 얘기를 다시 떠올렸다. 그러니까, 네가 바로 그 늑대 같기도 하고 표범 같기도 한 그거란 말이야? 기가 찼다. 들은 얘기에 따르면 며칠 동안 그 세탁소를 뒤지며 사자의 모자를 찾았던 것 같다. 그러다 마침내 오늘 사자의 모자를 찾아 그 냄새를 따라서 이 집에 온 거겠지. 외양은 늑대나 표범이라고 볼 수는 없겠으나, 그 근성은 확실히 그것들에 버금가기는 했다. 하지만 사자는 그런 걸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사자가 저를 올려다보는 개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여기 네 주인 없어.”
개는 짖지도 않고 멀뚱히 보기만 했다.
“나한테 이렇게 해 봤자 소용 없다고.”
한쪽 귀가 쫑긋 움직거렸다. 알아들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개는 본격적으로 들어볼 심산이라는 듯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온통 새까만데 발끝만 장갑을 낀 것처럼 하얀 털이 덮인 앞발이 가지런하게 모였다. 그 모습에 사자도 개의 앞에 자세를 낮추고 앉아 말했다.
“잘 들어, 개. 내 모자를 가져가면 나는 또 다른 모자를 구할 거야. 그럴 수 있어. 물론 피곤한 일이긴 하지만 가능해. 근데 넌 내 모자를 가져가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어. 네가 나한테 모자를 돌려주지 않아도, 돌려줘도 네 주인은 돌아오지 않아. 그건 누구의 힘으로도 해줄 수 없는 일이야.”
거기까지 말하던 사자가 문득 제 옆에 있는 신을 올려보며 말했다.
“뭐. 가끔 세상 사는 게 지루해진 마음 약한 신이 끼어들 때가 있긴 하지만.”
신의 과거 행적을 추궁하는 듯한 말이었다. 신은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사자는 다시 개를 바라봤다.
“근데 그런 신이 있다고 해도 이미 저승의 문을 넘은 자를 다시 이승으로 불러오진 못 해. 그러니까 이미 저승으로 가버린 네 주인 마음 불편하게 하는 짓 그만두고 내 모자나 내놔. 얌전히 내놓으면 곧 네 주인이랑 만나게는 해줄게.”
개가 사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개는 그의 말에 오랜 해석이 필요한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입에 물고 있던 모자를 툭 뱉었다. 사자가 바닥 위에 떨어진 모자를 재빨리 낚아챘다. 뒤에서 보고 있던 덕화가 오오오! 하며 감탄을 했다.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같다며 박수까지 쳤다. 그 말에 사자가 조금 으쓱해지려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신이 산통을 깼다.
“근데 곧 만나게 해주겠다는 게 뭔 소리야? 죽이겠다는 거야?”
사자는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무례한 도깨비.”
사자의 서슬에 신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실수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더니 또 금방 ‘근데 만나게 하려면 죽이긴 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묻는 게 아닌가. 그 말에 결국 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죽이는 게 아니라 죽는 거야! 얜 어차피 얼마 못 산다고!”
“헐! 얘 죽어요?”
덕화가 갑자기 동정 어린 표정으로 개를 바라봤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측은지심이 생겼나. 덕화는 주인 잃은 것도 모자라 죽기까지 해야 하는 거냐며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세상엔 온갖 불행의 중첩 끝에 죽음의 결과를 맞이하는 생명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건 측은할 것도, 불쌍할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들의 운명인 거다. 사자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을 잃은 그 날부터 사고 현장에서 떠돌던 개였어. 집에서 살던 개가 떠돌이로 지내면서 뭐 얼마나 더 살 수 있겠어.”
“안 됐다.”
“다 자기 명인 거야. 그러니까 내보내.”
“헐 이렇게 추운데요?”
다소 냉정하다 싶을 만큼 간단히 나오는 사자의 말에 덕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덕화의 그 표정을 본 사자의 눈은 오히려 더 동그래졌다.
“그럼 안 내보내게?”
“아니 그래도 이 추운데… 밖에 눈도 올 것 같고….”
“대체 어딜 봐서 눈이-”
사자가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함박눈이 쏟아졌다. 말 그대로 쏟아지는 거였다. 눈송이가 하나 둘 휘날리다가 내려오는 게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갑자기 쏟아 부은 것처럼. 그리고 그게 누군가의 의도라면 범인은 분명 이 자리에 있겠지. 사자는 말없이 제 옆의 신을 노려봤다.
“뭐 하는 거야?”
사자의 말에 신이 모르는 척 뭐가, 라고 능청을 떨었다.
“계약서에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동물 키우는 건 안 돼.”
“누가 키운대? 그냥 날씨가 이러니까 잠시 데리고 있어도-”
“그러니까. 날씨가 갑자기 왜 이럴까.”
방금까지도 멀쩡했던 날씨인데 왜 갑자기 눈보라라도 휘몰아칠 듯 저러는 건지. 그 답은 누구보다 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는 사자의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오히려 사자를 나무라듯 목소리를 높였다.
“넌 뭐가 그렇게 매정하냐! 얘가 너 모자도 갖고 왔잖아!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들고 온 애를-”
“이 모자 원래 내거거든!”
애초에 내 물건이었던 걸 어떻게 선물이라고 칠 수 있단 말인가. 사자가 황당해 하자 신이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신을 대신해 이번엔 덕화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내보내기가 좀 그렇잖아요. 일단 오늘만 데리고 있어요, 끝방 삼촌.”
그렇게 안쓰러우면 덕화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면 될 일 아닌가. 사자가 그 대안을 제시하자 덕화는 자신이 사는 집은 층간 소음 민원 때문에 개를 들일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단독 주택에 사는 재벌 3세가 대체 무슨 층간 소음에 시달려? 사자는 뭐라 더 얘기를 하려다 2대 1로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냥 포기해버렸다. 수적으로도 밀렸지만 무논리로 응대하는 이들에겐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거다. 누군가 그랬던가. 말을 해도 못 알아 들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고. 이게 딱 그 상황이었다.
사자는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제 방으로 향했다. 어쨌든 모자를 찾긴 찾았으니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개털 같은 게 조금 묻은 모자를 꼼꼼하게 털어낸 뒤 옷걸이 끝에 걸어뒀다. 모자가 걸려있어야 할 곳에 잘 걸린 걸 보니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사이 방 밖에서는 갑자기 환호가 들리기도 했다. 환호의 주인공은 덕화였다. 하도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서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도깨비가 집 밖에 세워뒀던 그 스포츠카를 드디어 본 모양이었다. 사자는 아까 집에 들어오기 전에 차 보닛 위에 큰 리본까지 달려있던 그것을 먼저 발견했었다. 덕화가 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한 스포츠카인 게 분명했는데 아까 도깨비가 덕화에게 온갖 싫은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모르는 척을 할 때엔 왜 저러나 의아했었다. 뒤늦게 스포츠카를 발견하고 집이 떠나가라 날뛰는 덕화를 보니 아마 저런 극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그랬던 모양이다. 참 도깨비다운 짓이었다.
문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밖이 조용한 걸 보니 덕화는 선물 받은 스포츠카를 몰고 진정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러 갔나 보다 싶을 때 방 문이 빼꼼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도깨비였다. 그리고 그 개까지.
“걔는 왜 데리고 와?!”
“야. 얘 너랑 좀 닮지 않았냐?”
갑자기 들어와 한다는 소리가 황당했다. 사자가 뭐? 하고 되묻자 신이 그 개를 제 품에 쏙 안으며 말했다.
“여기 얼굴 쪽이랑 손발은 하얗고 몸은 새까만 게 꼭 너 같지?”
그 말을 하며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낄낄 웃는 신을 향해 사자가 눈을 부라렸다. 그 눈빛에 신이 뒤늦게 표정 관리를 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그 개가 그렇게 좋으면 너야말로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생각하고 아예 받들어 모시지 그러냐?”
신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뭐, 귀엽긴 한데 얘가 내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니지. 내건 너한테 따로 있….”
말이 끝나기 전에 신의 입이 다물어졌다. 동시에 사자의 눈이 매섭게 그를 향했다.
“뭐라고?”
신은 사자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물론 사자가 그걸 그냥 두지는 않았다. 신의 눈앞에서 문이 쾅 닫혀버렸다. 신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사자를 돌아봤다. 신을 바라보는 사자의 눈에 의심, 아니, 확신이 들어차있었다.
“너 그날 나 따라왔지.”
“아니이!”
말꼬리가 지나치게 늘어졌다. 괜히 언성까지 높였다. 나 지금 거짓말 하는 중이라고 온 동네에 떠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사자의 눈이 게슴츠레해지는 것을 본 신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너 안 따라갔다니까!”
신이 아무리 말을 해도 찌릿찌릿 따가운 시선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내가 따라간 게 아니라….”
“…….”
“…내가 가는 길에 네가 있었던 거야.”
결국 사실대로 고하고 만 신의 말에 사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자신을 따라왔다는 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이 디자인 숍에서 선물을 사서 나오는 걸 다 봤다는 거. 그게 너무 참을 수 없게 치욕스러운 거였다. 꼭 들키면 안 되는 걸 들킨 것처럼. 옛날 이야기 중에 선녀가 제 옷을 훔쳐 간 나무꾼을 원망한 건 그가 옷을 훔쳐가서 그런 게 아니라 자기 알몸을 훔쳐봤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사자의 기분이 딱 그랬다. 아, 수치스러워.
사자는 어떻게든 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 사태를 벗어날 대안을 떠올렸다. 그러자 덕화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옳거니, 하고 그걸 잽싸게 물었다.
“그거 네 거 아냐. 덕화 거야.”
“덕화 지금 집에 갔는데 안 줬잖아.”
그런 핑계를 예상했던 것처럼 곧바로 튀어나오는 신의 대답에 사자는 좌절했다. 그것 말고는 다른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타 누락자 주려고 산 거라고 할까? 그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그건 방금 한 말보다 더 말도 안 되는 거였다. 결국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자를 물끄러미 보던 신이 갑자기 꽤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 눈 감을까?”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제 아예 손까지 내밀고 있다. 아까 덕화가 신에게 선물을 요구할 때의 그 설렘 가득한 표정과 포즈였다. 그럼에도 사자가 아무 기척도 없자 이제 아예 등까지 돌리며 말했다. 네가 민망하면 내가 아예 모르는 척 다시 들어올 의향도 있다고. 서프라이즈인 척 해주겠다고. 그건 마치 사자가 자신에게 무슨 이벤트라도 하려고 했다가 들킨 걸 우쭈쭈 달래주는 듯한 말투였다.
사자는 벌떡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저런 놀림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빨리 주고 해치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사자는 서랍 안에 잘 모셔져 있던 것을 문 앞에 있는 신에게 획 던졌다. 날렵한 동작으로 한 손을 뻗어 그걸 받아낸 신이 곧장 포장을 뜯으려고 했다. 그 기대 가득 찬 표정에 사자가 급하게 말을 붙였다.
“대단한 거 아냐. 기대는 하지 마.”
선물이란 걸 받아본 적도, 줘본 적도 없어서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자는 신이 포장지를 뜯는 걸 보지도 못하고 소리만 들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플라스틱 상자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도 들렸다. 딸칵.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그 정적에 사자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그냥 주지 말걸. 신이 속으로 얼마나 비웃을까 싶었다. 이게 뭐냐고 내던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설마하니 신이 저한테 준 선물을 그렇게 대할 정도로 인성이 글러먹은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쩐지 그런 극단적인 상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선물을 줄 때의 심정은 다 이런 걸까. 꼭 단두대에 올라가있는 기분 같잖아.
그때 픽-, 바람 빠지는 것 같은 가벼운 웃음 소리가 들렸다. 사자가 눈을 뜨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이 제 손에 들린 것을 보며 가볍게 웃고 있었다. 사자가 걱정한 것처럼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는 상자 안에 있는 북마크 하나를 꺼내 살랑 흔들어 보였다. 북마크 끝에 달린 테슬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이리저리 춤을 췄다. 그리고 그걸 웃으며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 예쁘네, 그랬다. 그 말이 너무 진심이라 사자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왠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자에게 이번엔 신이 아예 직격탄을 날렸다. 사자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한 것이다.
“고마워.”
그것 역시 너무나 진심으로. 사자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누군가의 말이 진심인 게 너무 와 닿을 때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는 왠지 변명 같은 말이라도 늘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냥… 보이길래 산 거야.”
궁색한 말이지만 신은 그냥 웃어버렸다. 어쩔 줄 모르는 사자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에 사자는 시선을 피하며 제 침대에 걸터앉았다. 신은 플라스틱 상자의 뚜껑을 다시 닫으며 말했다.
“나만 받아서 어쩌냐.”
“됐어. 잊었어? 부정청탁 금지. 특히 너한텐 못 받아. 선물을 빌미로 뭘 요구할 줄 알고.”
신은 또 웃었다. 사자는 입술을 물었다. 쟤는 왜 자꾸 웃어. 그런 생각을 하며 애꿎은 제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선물 하나로 이렇게 급격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새삼 인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이 어색한 일을 매해 생일마다, 기념일마다, 심지어 이렇게 크리스마스마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자는 절대로 두 번은 못할 것 같은 어색한 선물 증정식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이 분위기가 견디기 힘든 건 사자뿐만이 아니었는지 신의 품에 안겨있던 개가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곤 점프를 하며 뛰어내린 개는 솜뭉치 같은 앞발로 문을 긁었다. 그걸 본 신이 문을 열어주자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쏙 달아나버렸다.
뒷목을 긁적거리던 사자가 무던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뭐하냐. 너도 나가.”
웬일로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 신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대로 나갈 것 같던 그가 다시 몸을 돌려 사자에게 다가오는 것은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침대에 앉아있던 사자의 눈이 제 앞으로 다가온 신을 올려다봤다. 그는 표정없이 물끄러미 사자를 내려봤다. 낯선 자세로 바라봐서 그런 건지, 이 분위기가 낯설어서 그런 건지, 신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보였다. 사자는 새삼 도깨비가 이렇게 생겼었나, 하고 그의 얼굴을 뜯어봤다.
쌍꺼풀 없는 긴 눈은 매서운 것 같으면서 부드럽게도 보였다. 곧게 뻗은 코는 그 눈의 생김과 잘 어울렸고, 깊은 인중 아래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입술은 단호하게 다물려 있었다. 거기까지 보던 사자의 위로 신의 얼굴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사자가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더니 이번엔 아예 어깨가 붙잡혔다. 스킨십에 예민한 사자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뭐야. 중얼거리며 어깨를 틀어 빼려는데 그보다 신의 동작이 더 빨랐다. 그는 사자의 어깨를 가볍게 당겨 안았다. 허리를 숙여 사자의 어깨를 감싼 신의 긴 팔이 그의 등허리 전체를 가뒀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톡톡. 어깨와 등 사이, 그 어딘가를 두드리듯 쓰다듬었다. 사자는 밀어내려는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안겨있었다. 자신의 어깨 위로 신의 뾰족한 턱 끝이 닿는 것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신의 몸이 떨어졌다. 그는 사자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이건 내 크리스마스 선물.”
“…….”
“친구끼리는 이런 날 포옹도 하고 그러는 거야, 친구.”
신은 그 말만 덩그러니 남긴 채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자는 신이 한 그 말을 곱씹었다. 친구끼리는 이런 것도 하는 거구나. 그가 알려주는 친구의 의미들이 생소했다. 사자는 어쩐지 제 가슴께를 벅벅 긁어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걸 친구끼리 하는 거라면, 친구끼리는 원래 이렇게 심장 아래를 간질이는 거냐고,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사자가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낯설고도 평화롭게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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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비 조카바보야..덕화바보...나도 스포츠카 사줘..☆
*큰 설정은 드라마 설정을 따라가고 싶은데 아직 방영중인 드라마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설정들이 넘나 많아여8ㅅ8
어쩔 수 없이 제가 만들어낸 설정들을 끼얹는 경우가 생기네요. 가령 개의 등장 같은 것.. 사실 드라마 상에서 깨비나 저승이가 개를 싫어하는 설정 같은 게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스럽기도 한데... 에잇 모르겠다! 연성은 연성일 뿐이니까여! 저의 오리지널 설정들은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주세여!
*올린 글 중에 가장 긴 글인 것 같아요. 쓸 내용이 많아서 사실 3편보다 4편을 먼저 쓰기 시작했었다는 건 안 비밀..
단숨에 읽기엔 좀 숨이 차는 글이지만 저는 쓰면서 굉장히 즐거웠네요. 깨비사자덕화의 티키타카 넘나 좋은 것^0^
제가 즐거웠던 만큼 읽어주신 분들도 즐거웠길 바라여!
*주절주절 말이 많았네여.. 진짜진짜 메리 크리스마스!!♡
(참고로 이번 편은 백예린의 Love you on christmas와 November song이라는 노래를 반복재생하며 썼어요. 예린아 내가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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