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조건

 2. 드라마 시청 시간 절대 방해 금지







 좁은 주택가 골목 안에서 때 아닌 소란이 일었다. 몇몇 사람들이 파자마 차림으로 대문 밖을 나와 가로등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골목 한 가운데에 세워진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를 뚫고 골목을 채웠다.


 무슨 일이래요? 죽겠다고 연탄가스를 마셨대 글쎄. 어머어머. 저 집 애랑 아빠랑 사는 그 집 아녜요? 그 집 맞아. 아빠라는 사람은 의식이 있나 보던데. 아휴.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애 생각해서 저러면 안 되지. 어, 저기 나온다, 나와.


 안쓰러움이 묻어있지만 결국 자신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가벼운 대화를 뒤로하고 새카만 구둣발이 골목을 거닐었다. 소리 없이 뚜벅뚜벅 움직이던 구두는 초록색 철제 대문 앞에서 멈췄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구조복을 입은 두 남자가 들것 하나를 양쪽으로 나눠 든 채 나왔다. 들것 위로는 하얀 천이 덮여있었다.



 “병신년 무술월 기미일 21시 09분. 사인 질식.”



 사자는 하얀 종이 위에 새빨간 글씨로 새겨진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곤 고개를 들었다.



 “최다람씨. 맞으시죠.”



 정면을 향하려던 사자의 시선은 천천히 떨어져 제 앞에 서 있는 작은 아이에게 멈췄다. 사자의 명치까지도 오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그의 얼굴을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을 하다 보면 이럴 때가 자주 있었다. 아직 죽음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망자에게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하는 이런 순간. 사자는 난감한 얼굴로 다음 말을 골랐다. 어린 망자를 대하는 것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매번 어떤 식으로 설명하든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하곤 했었다. 사자는 머릿속으로 최대한 쉬운 표현을 떠올렸다. 이제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이사 같은 거라고.  그런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거라고.


 신중히 고민하던 사자는 마침내 말을 꺼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앳된 목소리가 그것보다 먼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저 죽었어요?”



 아이의 말은 사자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죽음이 뭐냐고 묻는 순수한 호기심에 찬 물음도 아니었고, 엄마와 아빠를 그리워하는 울음 섞인 목소리도 아니었다. 덤덤하다. 그 표현이 열 세 살의 아이에게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딱 그랬다. 덤덤하게 자신의 죽음을 재확인하듯 물었다.


 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랬구나. 죽었구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실바람을 타고 얇게 파고들었다. 사자는 아이의 둥근 머리꼭지를 내려보던 시선을 돌렸다. 잠깐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낮은 한숨을 내쉰 사자의 고개가 골목 끝으로 돌아갔다. 가로등 아래엔 여전히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인영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왠지 익숙한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머리카락이 조금 풍성하게 곱슬거리는, 키가 큰 사내의 모습. 무심코 눈을 돌리려던 사자의 시선이 다시 다급하게 돌아갔다. 좀 전까지 보이던 남자의 모습은 금방 사라지고 없었다. 뭐지. 잘못 봤나. 사자는 자신이 그런 걸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싶으면서도, 그의 모습이 여기에서 보일 이유 또한 없다는 사실에 쉽게 수긍했다. 사자는 왠지 마음 한구석에 뭔가 걸리는 것 같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엔 뽀얗게 투명한 눈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죠.”



 사자의 말에 아이의 고개가 끄덕, 딱 한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날이 추워지니 부쩍 일이 많아졌다. 피곤으로 딱딱하게 뭉친 어깨를 주물거리며 방에서 나온 사자가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텔레비전 앞 의자에 앉았다. 이승 사람들이 저승사자를 떠올릴 때 짙은 다크서클을 빼먹지 않고 그려 넣으면서도 그 다크서클이 사실 그만큼 일이 많아서 생긴 거라는 건 절대 모를 거라며 툴툴대던 동기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산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다크서클이 진짜로 자신의 눈 밑에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선 지금 잠자리에 드는 게 좋겠지만, 사자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어 드는 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오늘 아침 놓친 드라마의 재방송까지 놓칠 수는 없었으므로. 하루라도 밀리면 다음 회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든 게 바로 아침 드라마의 묘미였다.


 사자는 익숙하게 케이블 채널의 번호를 눌렀다. 채널이 바뀌자 때마침 화면 위로 87회라고 적힌 자막이 떠올랐다. 운 좋게도 시작 시간을 잘 맞췄다. 사자는 씨익 웃으며 바른 자세로 본격적인 시청에 돌입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의 등 뒤로 살랑살랑 곱슬머리를 날리며 소리 없이 다가온 도깨비만 아니었다면.



 “여기 내 자린데.”



 바로 머리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의자 위에 붙어있던 사자의 엉덩이가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통 튀어 올랐다.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획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이는 도깨비의 얼굴에 화가 나기보다 자신의 과도한 리액션에 대한 민망함이 먼저 몰려왔다. 신은 놀라서 할 말도 찾지 못하고 쉬익쉬익 숨만 내쉬고 있는 사자를 향해 쯧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저승사자 체질은 아닌 것 같다.”

 “너, 너, 제발 인기척 좀 내고 다녀!”

 “네가 무딘 거야. 둔한 저승사자.”



 300년을 살며 둔하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들어봤다. 사자는 네가 너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거라고 쏘아붙이려다가 갑자기 창문을 톡톡 치며 내려오는 빗방울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사자의 눈이 창밖으로 향하자 신의 시선도 덩달아 따라갔다.



 “비네.”



 사자가 할 말을 대신하듯 툭 뱉은 신이 긴 팔을 뻗어 다른 의자를 끌고 왔다.  사자의 옆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의 손엔 맥주 한 캔이 들려있었다. 사자의 눈이 신의 동작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 느껴질 텐데도 신은 부러 외면하듯 번쩍거리는 텔레비전 화면만 보고 있었다.



 “넌 저런 게 재밌냐.”

 “여기서 300년 살다 보면 사는 것보다 저런 게 더 재밌어져.”



 자주 듣는 질문이라 평소 대답하던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뱉어놓고 보니 아차 싶었다. 사자는 여기에서 300년을 살았지만 도깨비는 900년이었다. 그나마 단 한번 제대로 죽지도 못한 채.  말실수를 한 것 같아 입술을 깨무는 사자를 슬쩍 바라본 신은 오히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러냐, 하며 고개를 끄덕거린 게 다였다. 그 반응에 신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사자의 표정이 더 기묘해졌다. 역시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내가 너보다 몇 백 살이 더 많다며 같잖은 나이 자랑이라도 했을 텐데 그냥 조용히 넘어 가다니. 밖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그렇고. 두 캔이면 필름까지 끊기는 주제에 잘 하지도 못하는 맥주를 따서 마셔대는 꼴도 그렇고.



 “웬 술.”



 넌지시 묻는 사자의 말에 신이 마시던 맥주 캔을 그에게 내밀었다. 마실래? 눈썹을 들어 올리며 표정으로만 묻는 것에 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신은 내밀었던 맥주 캔을 다시 제 입으로 거둬갔다. 그의 목울대가 꿀렁 움직이며 맥주 한 모금을 넘기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톡 쏘는 탄산감에 신은 눈썹 사이를 찡그리며 말했다.



 “술은 원래 이유 없이 마시는 술이 가장 맛있지.”



 그런가. 사자가 눈동자를 굴리는데 곧바로 신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맛이 없네.”



 그 말인즉슨 오늘은 마시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가 되시겠다. 창밖의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지고, 창문을 치는 소리도 더 자주 들려왔다. 투둑. 투두둑. 꼭 누가 문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사자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입안에서 맴도는 질문을 여러 번 되삼켰다가 다시 혀끝으로 올렸다가, 또 되삼켰다. 무언가 물을 생각이긴 했는데 뭐라고 물어야 할지 잘 몰라서가 이유였다. 왜 맥주가 맛이 없느냐. 비는 왜 내리느냐. 왜 잠 안 자고 이러고 있느냐. 다양한 형태의 질문 중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는데 사자의 주저가 의미 없게 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야, 저승.”

 “뭐.”

 “너는 왜 저승사자가 된 것 같냐?”



 황당한 질문에 사자가 허 웃어버렸다. 웃겨서 그런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그걸 알면 내가 전생이 궁금할 일도 없겠지.”



 전생에 누구였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떻게 죽어 이렇게 되었는지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는데 왜 저승사자가 됐는지는 어떻게 알겠는가.



 “하긴. 나는 900년을 다 기억하는데도 잘 모르겠다. 내가 왜 도깨비가 됐는지.”



 신의 목소리가 축축했다.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간 맥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새 사자의 머리 위로 희뿌연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사느란 습기가 그들이 떨어져 앉은 의자 사이를 부유했다. 신의 옆얼굴이 안개 뒤에 가려 어른거렸지만 푹 젖어 늘어진 그 목소리만큼은 분명하게 들려왔다.



 “난 900년을 살아왔잖아. 잊을 수도 없고, 잊혀지지도 않는 그 긴 세월을 이 한 몸으로 모두 겪어왔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모르겠다. 내가 왜 도깨비가 됐는지. 왜 이런 힘을 가지게 됐는지. 그게 왜 하필 나인지.”



 신의 목소리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지만 또 가볍지도 않았다. 어떻게 들으면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 하는 것도 같았다. 자신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또 간절하게 염원을 비는 정도의 신이 되려면 적어도 더 현명한 존재여야 하는 거 아니냐. 실수 같은 것도 안 하고. 완벽하고. 자애롭고. 왜 그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처럼.”



 윽. 사자의 목 안에서 못마땅함을 담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신이 그런 사자를 바라봤다.



 “여기서 그 이름 얘기 하기 있냐?”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귀를 후비적거리는 사자의 모습에 신이 푸흡 웃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텔레비전 빛에 의지한 채 처음으로 두 눈이 마주쳤다.



 “그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이라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 정도는 돼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야. 사람들이 모르는 앞날을 훨씬 더 앞서서 내다보고 틀림없이 완벽하게 처리하는.”

 “그 어떤 신도 완벽하지 않아. 하물며 네가 말한 그….”



 사자는 예수의 이름을 떠올리다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다 완벽하진 않다고. 내 직속상관도 마찬가지야. 그분이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는지 너는 상상도 못할 거다.”

 “그래도 900년을 사는 도깨비가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자의 눈썹 사이가 찡그려졌다. 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게 지나친 비약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가정은 무의미하다. 김신이 아닌 다른 도깨비.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그 도깨비가 김신보다 나을 거란 것 또한 가정이다. 가정의 가정까지 해가며 제 존재의 이유를 부정하는 건 너무 김신답지 않다. 사자는 왠지 저가 다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일 있냐?”



 묻는 표정으로 봐선 신보다 사자가 더 일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만큼 진지했다. 신은 그런 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흐음,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아이 잘 갔냐.”

 “누구.”

 “초록색 대문.”



 그 말에 사자의 머릿속에 가로등 불빛 아래로 보였던 남자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역시. 아까 본 그게 도깨비가 맞았다.



 “잘 갔어.”



 사자의 대답에 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이 우연히 그 골목에서 일을 하는 사자를 보게 된 건 아닐 것이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괜히 기억해뒀다가 지금 이 순간에 그 아이의 일을 다시 물어본 것 또한 절대 아닐 것이다. 사자는 신이 그 아이 때문에 이렇게 우울해하는 건가, 라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다.



 “아는 아이였냐?”



 맥주 캔에 입을 대는 신의 표정을 살피며 묻는 사자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매일 서로를 잡아먹을 듯 달려들며 도깨비 신부를 데려가겠다느니, 너 또 사람 죽이러 가냐느니 험한 말을 주고받긴 하지만, 만에 하나 사자가 오늘 데려간 아이가 정말 도깨비와 아는 사이라면 그건 얘기가 좀 달랐다. 그게 사자의 일이라는 것과 별개로 이별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니까. 억겁의 세월을 지나왔더라도, 그래서 슬픔의 농도가 옅어졌다 해도, 그래도.


 어느새 맥주 캔 하나를 다 비운 신이 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자와 눈을 맞췄다. 잠잠히 가라앉은 신의 안광에 사자가 그 시선을 피하며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고, 하며 얼버무리려는데 그 말을 자르고 신이 말했다.



 “그 아이가 아니라, 그 아비를 알지.”



 신의 손안에 든 맥주 캔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형체를 알 수 없게 찌그러진 캔이 의자 밑으로 떨어졌다. 텅, 텅텅.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캔이 잠잠해지자 그 뒤로 신의 숨소리가 길게 흘러나왔다. 그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내는 그의 얼굴은 왠지 긴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는 듯 고단해 보였다.



 “10년 전에 한 남자를 만났어.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삶이 그를 따라주지 않는 남자였지. 그 남자는 거의 인생의 끝에 내몰려있었어. 세 살배기 딸과 아내의 잠든 볼에 입을 맞추고 한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집을 나서더라고. 사채 빚을 갚기 위해 자기 장기를 팔겠다고 말이야. 그걸로 가족들이라도 편하게 살게 하고 싶어서.”



 말을 잇는 동안 신의 시선이 점점 떠올라 천장을 향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때 그 시간, 그 남자, 그 장소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앞을 막아 서고 말해줬어.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당신이 장기를 팔아도 어차피 빚은 다 갚지 못할 거다. 장기밀매업자들이 당신 장기 값의 반을 떼 간다. 당신의 딸과 아내는 가난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아비까지 잃게 될 것이다. 그 말을 해줬지. 그러니까 내 앞에서 무릎을 꿇더군. 자기 몸에 손톱 발톱까지 다 떼가도 좋으니 제발 그 돈은 가족들한테 그대로 전해주라고. 날 장기밀매업자로 알았던 모양이야. 대신에 난 다른 길을 알려줬어. 지금 공항으로 가면 너와 동업했던 그 남자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 남자를 잡으면 빚은 일부 갚을 수 있고, 남은 빚은 네가 살면서 충분히 갚을 수 있을 수준이 될 거라고. 그렇게 하면 앞으로 분명 더 좋은 일이 찾아올 거라고. 확신을 주었지.”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리던 신의 눈이 천천히 사자를 향했다.



 “너 확신이 왜 무서운 줄 알아?”



 사자는 신의 말에 대답 없이 그와 눈을 맞추고만 있었다. 애초에 대답을 듣자고 물은 것도 아닌 듯 신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남자는 신이 말한 더 좋은 일을 끝없이 기다렸어. 새 직장을 얻었고, 건강하게 커가는 딸과 아내와 행복한 생활을 누렸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일을 기다렸지. 시간이 흐르며 남자는 제 심장을 내놓고 가족을 지키려던 그 순간의 비참함은 잊었어. 남자의 인생엔 신이 말해준 더 좋은 순간만 남은 거야. 지금은 의미가 없고 다가올 미래만 중요해진 거지. 남자는 최악의 순간에 찾아왔던 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더 끝없는 최악으로 떨어졌어. 그래도 그런 순간이 오면 신이 나타나 더 좋은 삶으로 가는 길을 또 알려줄 테니까.”



 빗소리 같은 목소리가 거실을 울리는 와중에 신의 눈가가 건삽하게 메말랐다. 조금 지친 듯 보이기도 했다. 사자는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900년을 산 도깨비의 고단함 같은 것이 보인다고 느꼈다.



 “확신이 무서운 이유가 이거야. 그 끝이 아주 처참하지. 심지어 그 잔인함은 신조차 빗겨가지 않아.”



 자조 섞인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자는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그렇다고, 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인간들이 무슨 일을 벌이든 그저 방기한 채 돌아서라고 말해주기엔 제 눈앞에 있는 마음 약한 도깨비는 그런 성격이 되질 못했다. 그렇다고 너는 잘하고 있다는 뻔한 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상대는 900년을 산 도깨비였다. 저가 무슨 위로를 해도 그건 그의 길고 고된 삶을 조금도 들여다보지 못하고 하는 말이었다. 위로를 위한 위로는 의미가 없었다. 사자는 그냥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까 그 아이가 차를 마시기 전에 이런 말을 하더군.”



 사자는 찻잔을 잡던 둥근 손끝을 떠올렸다. 찻잔 끝이 입에 닿기 전, 그 작은 입술이 뱉어냈던 말들도.



 “이걸 마시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고 묻더라. 엄마 얼굴도 잊고, 아빠 얼굴도 잊게 되는 거냐고. 나는 그게 끔찍한 기억을 잊고 싶어서 묻는 건 줄 알았어. 그래서 그래, 다 잊고 편안해질 수 있다, 그랬지.”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이의 눈 안엔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저승사자를 따라오는 내내 침착하기만 했던 아이의 눈에 차오른 그 눈물, 그건 도무지 기쁨의 눈물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 아이가 다시 말했어. 그럼 엄마랑 아빠랑 일곱 살 때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갔던 것도 잊게 되느냐고. 여름에 바닷가에 놀러 갔던 것도. 생일 케이크에 올려진 촛불을 불었던 것도. 다 잊어버리는 거냐고."



 사자가 조금의 텀을 두고 뒷말을 이었다.



 "아마 네가 아니었다면 그 아이가 망각의 차를 마시기 직전 잊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떠올린 그것들도 존재하지 않았겠지.”



 사자의 말을 듣는 신은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주의 깊게 듣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말을 전하던 사자는 그 말의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몰라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곧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난 네 일을 잘 몰라. 나한텐 네가 가진 그런 힘도 없고, 내가 보는 건 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뿐이라 너처럼 새로운 삶의 길을 나아가는 사람들을 본다는 게 어떤 건지 전혀 모르지. 하지만 이승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국 그 세상의 주인이 만들어간다는 건 알아. 우리가 신의 능력을 가진 건 맞지만, 신이 이 세상의 주인은 아니지. 삶은 결국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거야. 우리는 그들의 삶의 시작과 끝에서 이정표를 제시해줄 뿐인 거고.”



 사자가 말을 마쳤을 때에 신은 어느새 그의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자를 바라보는 신의 얼굴 위로 텔레비전을 통해 비친 불빛이 어른거렸다. 시시각각 바뀌는 불빛의 색깔은 오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빛에 따라 마치 신이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고, 또 읽을 수 없는 어떤 표정으로 변하기도 했다. 사실 사자는 꼭 그 형형색색의 불빛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 신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신은 오래도록 그를 향한 눈동자를 거두지 않았고,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사자였다. 텔레비전에서 드라마의 끝을 알리는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였다.



 “악, 끝났어!”



 리모컨을 쥔 사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사자의 눈이 획 돌아와 신을 노려보자 좀 전까지 깊게 침잠해 있던 신의 얼굴 위에 평소 같은 장난기가 맴돌았다. 그는 부러 약 올리듯 입술을 쭉 빼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자러 간다.”

 “진작 가든가! 드라마 다 끝나니까 가고 앉았어!”



 넘실넘실 손을 흔들며 여유롭게 사라지는 신의 등에 대고 차마 집어던지지도 못할 리모컨을 손에 쥔 사자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어느새 빗줄기는 멎어있었다는 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낮에 5중 추돌 사고가 났다. 고속도로도 아니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고라 현장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그 사이를 유유히 걷던 사자가 저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후배놈을 향해 슬쩍 손을 들어 보였다.



 “오셨어요.”

 “어. 아직 망자들은 안 나온 모양이야?”

 “네. 곧 나올 것 같아요.”



 사자는 제 손목에 붙은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걸 눈으로 좇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도 일이 많은 날이었다. 이런 자투리 시간에라도 좀 쉬어야 몸이 견뎌질 거다. 사자는 뻐근한 목을 돌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전광판을 바라봤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나운서의 영상 아래로 자막이 떠올라 있었다. ‘딸과 함께 자살 시도한 아버지, 병원에서 실종’ 그리고 뒤이어 다른 자막도 떠올랐다. ‘흔적도 없어, 또 자살 시도할 가능성? 경찰 추적중’ 아나운서의 얼굴이 사라지고 병원 응급실 CCTV 화면이 나왔다. 의식도 없이 침대 위에 누워있던 남자가 잠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려졌던 그 짧은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거기까지 보던 사자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저거 혹시…? 사자의 얼굴 위로 의심이 떠오르는 순간, 멀리서 후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사자는 전광판에 꽂혀있던 시선을 화다닥 떼어냈다. 도로 위에서 망연히 두리번거리는 망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사자는 도깨비의 얼굴과 함께 떠올라 혼재되는 생각들을 조금 뒤로 미루고 모자를 고쳐 썼다.











 사자는 마지막 일을 끝내자마자 망각의 찻집에서 순식간에 집으로 이동했다. 옷은 물론이고 모자도 벗지 않고 거실로 가 텔레비전을 켰다. 어제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드라마의 재방송 시간이 무려 5분이나 지나있었다. 어제도 제대로 못 봤는데 오늘마저 놓치면 진짜 내용을 따라갈 수가 없다.


 사자는 채널을 돌리자마자 텔레비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몰입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 자신의 사무실에서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뭐야. 쟤네는 뭐 때문에 싸우는 거지? 상황 파악이 안 돼 입술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사자의 어깨 위로 느닷없이 시커먼 얼굴이 확 튀어나왔다.



 “또 보냐?”



 악, 하고 비명을 지르려던 사자는 이제 놀랄 기운도 없다는 듯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팩 고개를 돌렸다. 사자의 귀 옆에 바싹 붙어있던 도깨비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가득 들어찼다. 가늘게 내리뜬 눈이 왠지 사자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면 좀 과대망상일까. 그 눈빛에 순간 얼어붙어버린 사자는 뒤늦게 몸을 확 젖히며 뭐야! 하고 어깨를 털어댔다. 그 유난스러운 퍼덕거림에 신이 숙였던 몸을 들어 올렸다. 사자의 눈이 멀뚱히 저를 바라보는 신의 얼굴을 따라 올라갔다.



 “넌 또 왜 나왔어?!”

 “내 집에서 내가 맘대로 거실에 나오지도 못해?”

 “가서 잠이나 자!”

 “넌 이게 뭐가 재밌다고 잠도 안 자고 보냐?”

 “내 드라마 시청 시간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언제 방해한대?”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옆에 앉는 건 왜지. 왜 앉냐고 한마디 하려던 사자는 마침 텔레비전에서 짝! 하는 찰진 마찰음이 들리는 바람에 말을 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뺨을 때린 거였다. 세상에. 둘이 왜 저래? 사자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드라마에 빠져드는 순간 화면 밑으로 주요 뉴스 예고 자막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안엔 사자가 오늘 낮 전광판에서 본 사건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딸과 함께 동반 자살 시도했던 아버지 실종돼 경찰 추적 중’ 그 자막이 눈에 들어오자 사자는 도저히 드라마에 집중할 수가 없어졌다.


 드라마 한번 보기 진짜 힘드네. 사자는 하필 제 옆에 있는 게 도깨비라서 이걸 물어야 하나, 모른 척 넘어가야 하나 망설였다. 어느새 자신을 따라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신을 곁눈질로 흘겨보던 사자는 갑자기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신의 모습에 깜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그 동작이 다소 굼떴던 모양인지 신이 그런 사자의 옆얼굴을 못 미덥게 바라보며 물었다.



 “뭐냐.”



 그 물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으나 사자는 일단 모른척하기로 했다. 기다렸다는 듯 물어보는 건 좀 속 보이는 짓 같아서. 태연하게 뭐가, 하고 받아치는 사자를 향해 신이 다시 말했다.



 “그 눈빛 뭐냐고. 할 말 있으면 해. 그렇게 뭐 마려운 개처럼 꼼지락대지 말고.”

 “이게 누굴 보고 개라고-”

 “그럼 내가 먼저 얘기해? 그 남자 내가 그런 거 아냐.”



 신의 입을 통해 나온 뜻밖의 말에 사자는 흡 숨을 들이켰다. 그다지 많은 정보가 들어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사자는 그 의미를 단숨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자신이 묻고 싶어 했던 그것이라는 것도.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을 너무 콕 꼬집힌 탓인지 사자가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신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생각 좀 작게 해. 다 들리네, 아주.”



 사자는 설마 자신이 진짜로 도깨비에게 다 들리게 생각을 하고 있었나 싶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드, 들렸냐? 머쓱하게 묻는 사자의 반응이 우스워 신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자는 저가 좀 예의 없는 의심을 했다 싶어 다소 공손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네가 그런 거 아냐?”

 “어. 뭐, 만나기는 했는데….”



 만나기는 했다는 신의 말에 사자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이것 보라는 듯 또다시 의심의 눈초리로 바뀌는 것에 신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만나기만 했어, 만나기만.”

 “만나서 뭐 했는데.”

 “삶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줬을 뿐이야.”

 “뭘 어떻게.”

 “네 삶은 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너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거라고. 나를 처음 만났던 그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말해줬어. 그게 다야.”



 신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는 사자에게 진짜라고, 하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정신 차리더니 갑자기 딸을 봐야겠다고 사라진 건 그 남자 선택이야.”

 “사라졌어? 그 혹시-”



 그런 극한 상황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좋지 못한 결정을 내린다. 그걸 떠올린 사자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신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딸 보기 부끄러워서라도 안 그럴 거야. 이제 다시는.”



 정 의심스러우면 나중에 저승 대기 명단이라도 확인해보라는 신의 말에 사자도 그를 따라 고개를 저었다. 딸 보기 부끄러워서라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말이 왠지 저승의 명단보다 더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지금쯤 아마 가장 끔찍한 용서를 구하고 있겠지.”



 신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한 남자의 오열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남자를 찾아간 건 이렇게라도 일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지만, 그걸 책임감이라고 칭하기엔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거창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와는 비교도 안 되게 더 비겁한 밑바닥의 감정일지도 몰랐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자기 위로 같은 것. 그래서 사자가 왜 그렇게 했느냐고, 그렇게 겪어 놓고도 왜 또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느냐고 추궁이라도 해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제 입을 통해 나온 모든 것은 그저 변명에 불과할 텐데.


 하지만 신의 예상과 달리 사자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잘했네’하고 무심하게 말하며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린 게 다였다. 화면에서 쏟아지는 사광이 사자의 하얀 얼굴을 어지럽혔다. 물너울처럼 어룽어룽 번지는 빛에 시선을 빼앗기느라 신은 자신을 일별하며 묻는 사자에게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근데 너 안 자냐?”



 가볍게 묻는 사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 얼굴을 빤히 보던 신의 시선이 한발 늦게 떨어져 나갔다. 그리곤 아무 말도 없었다. 왜 답이 없어, 하고 중얼거린 사자가 도로 텔레비전을 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신의 시선이 황급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잘못 느꼈나 싶어 다시 한번 바라보자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자신을 향해있던 눈동자의 검은 흔적 같은 게 점점이 보이는 기분. 시선의 방향이 순식간에 바뀌는 그런…. 뭐지?


 사자가 신의 태도를 수상하게 여겨 뭐라 입을 떼려는데, 텔레비전에서 또 한번 마찰음이 들려왔다. 이번엔 아까보다 좀 더 큰 소리였고, 그 소리의 종류도 달랐다.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양어머니에게 뺨을 얻어맞았다. 그것도 뒤집개로. 와 이거 뭐야? 사자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자신의 양어머니를 쏘아보는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었다. 늘 똑같이 흘러나오는 엔딩송이 들려왔다. 이대로 끝이라니! 오늘도 제대로 보지 못한 사자가 거의 울 것 같은 눈으로 리모컨을 쥐었다. 신이 그런 사자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잔다.”

 “어.”



 반사적으로 답한 사자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손길로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자신이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씻고 자려면 또 한 시간은 훌쩍 지날 것이다. 사자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직전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도깨비의 방문이 굳게 닫혀있는 게 보였다. 근데 쟤, 진짜 왜 나왔던 거지? 느닷없이 떠오른 의문에 사자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있었다.











 사자가 모처럼 한가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늑장을 부리며 일어난 그는 느지막이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버릇처럼 거실과 부엌, 그리고 복도 너머를 두리번거렸다. 식탁에 앉아 야만적으로 고기를 썰고 있거나, 거실 의자에 앉아 어울리지 않게 영자 신문 같은 걸 읽고 있어야 할 도깨비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화장실 갔나. 부엌 안으로 들어서며 화장실 문을 바라보던 사자는 마침 그 문을 열고 나타나는 덕화와 눈이 마주쳤다. 끝방 삼촌! 하고 저를 부르는 덕화의 인사에 사자는 묘하게 실망이 섞인 목소리로 어어, 하고 대충 화답했다.



 “끝방 삼촌 오늘 늦게 나가네요.”

 “어. 넌 언제 왔냐?”

 “좀 전에요. 삼촌은 저 들어올 때 나가던데요?”



 덕화가 묻지도 않은 신의 행방을 얘기하자 사자는 꽤 귀가 솔깃해졌으면서도 겉으로는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는 듯이 대답이 없었다. 어디 간다고 했는데? 하고 뒤이어 떠오르는 궁금증도 당연히 묻지 않았다.


 그는 냉장고 야채 칸에서 미리 씻어두었던 샐러드 재료들을 꺼냈다. 몸을 돌려 싱크대 찬장에서는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접시도 꺼냈다. 거실을 배회하는 덕화의 발소리에 ‘샐러드 먹을래?’하고 예의상의 인사치레도. 덕화는 풀은 싫다며 질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사자는 접시 위로 딱 저가 먹을 분량의 샐러드만 덜었다. 그 위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참깨 드레싱도 한 바퀴 돌려 뿌렸다. 야채 사이로 걸쭉한 드레싱이 뚝뚝 떨어져 스며들었다.



 “어, 끝방 삼촌. 이거 해요!”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샐러드 한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향하려던 사자가 덕화의 말에 발을 멈췄다.



 “뭐가.”

 “이거 드라마요. 절벽 위의 꽃!”



 덕화가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끝방 삼촌이 맨날 챙겨보는 드라마 아녜요? 묻는 말에 사자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텔레비전이 아니라 식탁 앞으로 가 앉았다.



 “안 봐요?”



 드라마, 특히 아침드라마는 일이 없을 때엔 꼭 본방으로 챙겨보는 사자가 말없이 식탁에 앉아 포크를 들고 있으니 덕화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사자는 포크로 드레싱이 잘 섞여 들도록 샐러드 사이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안 봐도 돼.”

 “왜요?”



 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뭐람. 당황스러운 덕화가 사자의 얼굴을 빤히 보며 ‘혹시 어디 아파요?’하고 묻자 영 귀찮아진 사자의 입에서 성의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냥."

 "그냐아앙?"

 “어. 나중에 재방 보면 돼.”

 “본방이 하는데 왜 굳이….”

 “아, 그냥 재방이 보고싶다고.”



 더는 묻지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인 사자가 잘 버무려진 샐러드를 포크로 콕콕 찍어 한입에 쏘옥 집어넣었다. 싱그러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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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시작할 때에는 분명 우당탕탕 깨비네, 같은 걸 지향했었는데 분위기는 산으로 가네 이게 무슨 일이야?

* 이번 연성은 좀 짧은 호흡으로 써보자 생각했는데 늘 쓰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역시 길다..그냥 쓰던 대로 쓰자...응..

* 깨비사자가 메이저이긴 한가보아여. 한가한 블로그에 찾아와 댓글까지 남겨주시는 분들 고맙읍니다.. 한분한분 인사하지 못해도 너무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오 저가 수줍음이 많아서 소담한 하트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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