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조건

7. 개인 공간 존중







 “어? 아저씨?”



 하얀 얼굴의 소녀가 응급실로 들어서는 이를 알아보고 흔드는 손. 예상치 못한 만남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반가움을 어쩌지 못한 채 해사하게 번지는 미소. 그러다가 입가에 난 상처로부터 찌르르 아픔이 전해지자 슬쩍 찡그리는 눈가까지. 사자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본다. 그 아이가 아니라, 그 아이의 얼굴을 살피며 시시각각 눈빛이 변하는 신을.



 “어떻게 왔어요? 나 촛불도 안 불었는데?”

 “너 보러 온 거 아냐.”



 신은 아이에게 괜히 뻔한 거짓말을 한다. 다른 일이 있어서 들렀는데 그냥 네가 있더라는, 그런 믿기지도 않는 말을 핑계라고 둘러댄다. 그런데도 아이는 정말 그런가 싶어 입술을 삐죽인다. 신의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사자를 보고 사자의 볼 일 때문에 온 거구나, 하고 스스로 납득까지 한다. 사자는 아이의 그런 오해를 애써 풀어주고 싶지는 않다. 실은 저 도깨비가 네 위험을 알고 곧장 여기로 튀어온 것이라는 말은, 그냥 속에만 담아둔다.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 얼굴이 그래.”

 “사고라뇨! 이 아저씨가 증말!”



 아이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응급실의 이목이 집중되자 다시 입술을 오므린다. 사람된 도리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는 말을 퍽 비밀스럽게 소곤거리는 아이를 향해 신의 몸이 기울어진다. 아이의 목소리를 더 듣기 위해서, 또 그 터지고 멍든 입가를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 작은 몸짓에 아이의 목이 빳빳해졌다는 것을, 그 하얗고 조막만한 얼굴의 양 볼에 붉은 물감 한방울이 톡톡 떨어진 듯 달아올랐다는 것을, 신은 알까. 조금 떨어진 사자에게마저 다 전해지는 잔잔하고 간지러운 감정의 물결을 그도 느끼고 있을까. 그것들이 만들어낸, 사자로서는 도저히, 한 발자국도 침범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사람의 커다랗고 두꺼운 결속 같은 것을.


 사자는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닌 것만 같아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 있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도깨비를 기다리기라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수런수런 주고 받는 말소리가 들린다. 잘 들리진 않지만 말 중간중간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라는 단어가 섞이는 건 확실히 들렸다. 산 사람들의 대화는 아님이 분명했다. 사자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자신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대화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빠르게 발을 옮겼다.



 “야, 진짜 도깨비 맞는데? 너 어떡하냐?”

 “나도 쟤가 다칠 줄은 몰랐지! 아니, 쟤는 사람이 달려드는데 피하질 않고 왜 그러고 서 있대?!”

 “아저씨가 부탁한 거잖아요.”

 “내가 뭐 누가 달려들면 피하지도 말라 그랬냐! 어린 애가 왜 그렇게 민첩성이 없어 갖곤…!”



 중년 여성 한 명과 기껏해야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 그리고 서른을 넘겼을 것 같은 남성까지 총 셋으로 보이는 그들은 다가오는 사자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대화를 이었다.



 “아저씨 어떡해요? 도깨비한테 죽는 거 아냐?”

 “난 이미 죽었거든!”

 “아예 지옥불로 떨어지는 거 아니냐구요.”

 “이게 진짜…! 도깨비가 날 무슨 수로 지옥불로 떨어뜨려!”



 도깨비 지도 죽지 못해서 저렇게 살아 있는데. 무심하게 내뱉는 남자의 뒷말에 사자의 눈이 매서워졌다.


 

 “막말로 내가 뭐 억지로 떠밀었어? 난 그냥 나 억울한 거 얘기한 것밖에 없다고. 괜히 쟤가 나 억울한 거 풀어주겠다고 했다가 저렇게 된 건데, 뭐.”

 “근데 쟤 진짜 도깨비 신부가 맞긴 맞았나 보네요. 소문만 들었을 때엔 거짓말인 줄 알았더니.”

 “맞아,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 도깨비 책임이야. 쟤가 도깨비 신부가 돼서 귀신도 보고, 팔자가 기구해진 거라니까. 도깨비는 신부를 찾았으면 빨리 자기 검도 뽑고 결혼도 하고 해서 쟤 인생 살게 했어야지. 안 그래?”

 “목소리 낮춰. 도깨비 들을라.”

 “아이고, 들으라 그래요. 하나도 안 무섭네요.”



 혀가 가벼운 자의 주워 담지 못할 천박한 말들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사자는 순식간에 그들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도깨비는 안 무서워도 나는 무섭겠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그들은 영문을 몰라 사자를 위 아래로 훑었다. 누구세요. 젊은 여성이 그렇게 물으며 사자와 눈을 맞췄다. 그 순간 사자의 정체를 안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나머지 둘을 향해서는 사자가 직접 입을 열었다.



 “너희를 지옥불로 떨어뜨릴 수 있는 저승사자.”



 허억. 숨을 들이키는 소리. 누구에게서 나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사자는 그런 것보다 자신이 언뜻 들은 그들의 대화 속 진상을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저 아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고해야 할 거야. 지금 당장 나한테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얼음장 같이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에 겁을 집어 먹은 중년 여성이 먼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사자는 고개를 젓는다. 그가 지목한 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절주절 잘도 떠들었던 가벼운 주둥이의 남자였다. 얘기해. 그 거역할 수 없는 명령조에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홀린 듯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는 그리 길지도 않았다. 회사에서 산업 스파이로 찍혀 외롭고 억울하게 살다가 괴로운 마음에 스스로 죽음으로 떠밀렸다는 남자. 그 억울함에 죽어서도 저승으로 향하지 못해 떠돌다가 지은탁을 만났다고 했다. 저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곤 무당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이들뿐이었는데, 지은탁은 싫은 척하면서도 자신의 얘기를 곧잘 들어주었고, 이해도 해주었다고. 그래서 다른 건 다 괜찮으니 자신이 산업 스파이라는 억울함만 풀어 달라고 했단다. 진짜 범인을 밝혀 달라고.


 다만 남자는 어리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지은탁에게 감춘 얘기가 있던 거였다. 한 회사의 몇 억짜리 프로젝트를 다른 회사에 냅다 팔아 넘기는 짓은 결론적으로는 분명 그가 한 게 아니었지만, 사실 그는 그것을 하지 못 했을 뿐이지, 함께 계획은 하고 있었다는 것. 그가 진정 억울했던 것은 산업 스파이로 찍힌 것이 아니라 계획이 틀어져 저와 함께 일을 꾸몄던 자가 자신의 몫을 챙겼다는 것. 그래서 은탁에게 저와 함께 범인을 폭로해달라고 했던 거였다. 저가 갖지 못한 돈을 그 자도 갖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


 거기까지 듣던 사자는 환멸을 느낀다. 기타누락자는 대체 왜 이런 자의 말을 들어줬을까. 이 들을 가치도 없는 자의 말을.


 남자는 찡그려지는 사자의 얼굴을 보며 거의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 새끼가 그래도 겨우 고등학생인 은탁을 그렇게 때릴 거라고까진 생각을 못했다고.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더 지껄이려는 것에 사자가 남자의 입을 막는다.



 “그러니까 네 억울함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한이지만, 그 한을 풀어 주려다가 당한 지은탁의 억울함은 네 알 바가 아니다?”

 “그건…!”

 “분명히 너로 인해 벌어진 짓이지만 이 모든 일을 저 아이의 팔자나 도깨비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너를, 내가 온전히 저승으로 올려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남자를 바라보는 사자의 표정이 싸늘하다.



 “죽은 자가 산 자의 생에 영향을 끼쳐선 안 되는 법. 그것은 산 자가 산 자에게 행하는 짓보다 질이 나쁘고, 세상의 이치를 어지럽히는 악행에 포함돼 더욱 엄하게 다스려져야 하는 것. 나는 네가 내 찻집을 들어서는 순간 그것을 분명히 고할 예정이다.”



 사자는 그렇게 말하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 위에 계신 분께.”



 남자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그는 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바닥을 비벼댔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몇 번이고 이어지는 말에 사자는 대체 나에게 잘못한 게 뭐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는 사자에게 잘못한 게 없다. 정작 그가 잘못한 사람은 응급실 침대에 앉아 있는데도 엉뚱하게 사자의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린다. 사자는 그런 그가 한심해 고개를 젓는다. 사과조차 제대로 못하는 이.


 이 한심한 자가 도깨비의 눈에 띄기 전 해결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자의 등 뒤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생각이 도깨비보다 한 발 늦은 것이다.



 “이 자야?”



 뻔히 알면서도 묻는 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일 났네 싶어 사자가 남자의 앞을 막아 서려는 찰나 신의 손이 그의 어깨 너머를 쑤욱 지나간다. 그 크고 단단한 손이 사자의 뒤에 서 있던 남자의 멱살을 맹수처럼 낚아챈다. 목덜미가 잡힌 남자는 컥컥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허공에 떠올라 발을 동동거린다. 그리고 사자가 뭘 어떻게 하려고! 라고 소리치며 어찌 말릴 새도 없이 신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사자는 몸을 돌려 제 뒤에 있던 남자도 함께 사라진 것을 확인하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프다. 아,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흥분하면 감정부터 앞서 일을 저지르고 보는 도깨비의 성질을 뻔히 아는 사자는 부디 그가 신이 노할 짓만 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자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 만에 다시 불꽃을 일으키며 나타난 신은 그와 함께 사라진 남자는 어디에 버려두고 온 건지 혼자였다. 사자가 그의 뒤를 살피며 그 자는? 하고 묻자 어깨를 으쓱거린다.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그러게. 어디 갔지.”



 장난이라도 치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꼴에 어이가 없다. 지금 저승사자 앞에서 이승을 떠도는 귀신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거지. 그래놓곤 잘도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다고? 사자가 뭐라 한마디 더 붙이려 하자 죽이진 않았어, 그런다. 그래. 죽이진 않았겠지. 이미 죽은 자를 설마 두 번 죽였을까!



 “너 똑바로 말 안 해? 사자가 귀신을 놓치면 그 처리 과정이 얼마나 복잡한 줄 알아?!”



 사자의 채근에도 신은 모른척 고개를 돌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남자와 같이 있던 다른 귀신들이 벌벌 떨며 서 있었다. 그들을 꿰뚫듯 내려보는 신의 시선이 칼날처럼 날카롭다.



 “다시 한번 더 저 아이의 눈앞에 나타나면, 그땐 너희도 나와 함께 사라진 자와 같은 곳에 있게 될 것이다. 그곳은 아마 지옥보다 더 끔찍할 거야.”



 신의 말에 그들은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곤 가보라는 듯 턱을 까딱이는 신의 모습에 그대로 사라진다. 그러니까 사자는 지금 제 눈앞에서 귀신을 하나도 아닌, 셋을 놓친 셈이었다. 그 말인즉슨 그렇게 놓친 귀신 셋에 대해 상부에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한 남자는 도깨비 놈이 어딘가에 떨궈버렸고, 그게 어딘지를 알아내려면 아마도 그 도깨비와 얼굴 붉히는 우를 범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며, 나머지 둘은 도깨비를 피해 달아나 버렸다고. 저는 그 꼴을 바로 옆에서 뜬 눈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그 얘기를 어떻게 사유서에 쓴단 말인가.



 “너 누가 마음대로 그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돌린 사자의 시선이 향한 곳에 신이 없었다. 방금까지 사자의 바로 옆에 있었던 그가 어디 갔는지 찾을 겨를도 없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은탁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자가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신은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그 아저씨는요? 갔어요?”

 “어.”

 “어딜요? 누명 벗겨진 건 보고 갔대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순수하지만, 그래서 안타깝기까지 한 티없는 선함. 거기에 대고 신은 너 또 그렇게 아무 귀신들 하소연 다 들어줄 거냐고 나무란다. 꽤 단호하고 엄하지만 그 속에 담긴 염려와 걱정. 사자는 또 한번 그들 사이를 파고들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만 본다. 은탁은 볼을 부풀리며 대답한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해요.”



 그 말이 사자에게 날아와 꽂힌다. 그를 겨냥한 말이 아닌데도 사자의 몸 어딘가에 있는 과녁의 정중앙을 통과한 것처럼 움찔 떨리고 만다. 그리고 아릿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은탁을 내려보는 신의 얼굴에 이번엔 심장이 찔린다. 불면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민들레 홀씨를 손에 쥔 사람처럼 조마조마하고, 필사적이기까지 한 떨리는 눈. 그 눈빛. 사자는 어떻게 하면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는 건지 생각한다. 자신은 가져본 적도, 본 적도 없는 깊이의 눈동자라서 감히 가늠도 되지 않았다.



 “너 다시 한번 그랬다간 나중엔 네가 위험하다고 불러내도 절대로 안 와!”

 “아우 진짜! 치사하다, 치사해! 그리고 내가 뭐 언제 와달랬어요?! 오늘은 자기가 확 튀어나와 놓고서는!”



 조금 전까지 은탁을 향하던 깊은 눈은 없던 일인 것처럼 금방 장난스럽게 돌변해 티격거리는 둘의 다툼을 듣는 사자의 마음이 심란하게 부는 바람에 나부낀다. 모르겠다. 저 둘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운명으로 묶여서 필연적인 관계라는 건 대체 어떤 건지.


 누군가가 900년을 사는 이유이자 목적이었던 운명을 타고 난 사람으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대체 얼마나 단단하고 질긴 운명으로 엮여야 그만큼 누군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걸까. 또, 900년의 삶을 돌고 돌아 그 운명을 마주한 신의 기분은 어떤 걸까. 그가 어쩌면 자신의 신부일지도 모르는 아이를 대하는 마음이라는 건, 과연 어떤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걸까. 저 아이의 삶 속에서 닥쳐올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가 가져야 하는 책임은 대체 얼마나 무겁고 치열할지.


 지금껏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해야 하는 일만 해왔던 사자로서는 제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무거운 책임감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감정이라는 것들의 실체를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 그나마 최근 들어 신사나 신으로 인해 아주 어렴풋하게 짐작이나 하고 있는 게 다였다. 그런 사자에 비해 끊임없이 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자신이 도깨비 신부라는 운명을 감수하고 도깨비와의 만남을 기다려왔던 은탁이나, 긴 세월 불멸을 견디며 그런 도깨비 신부를 기다렸던 신은 아예 다른 세상의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저들과 비교하자면 사자는 그 어떤 것을 원한 적도, 원하지 않은 적도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사자는 불현듯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 자신은 단 한번도 무언가를 제대로 원한 적이 없었다. 늘 떠밀리듯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겼고, 자신은 마지못해 그걸 따라가는 듯. 그렇게 굴었다. 비겁함과 치졸함. 그게 사자의 삶을 정의 내리는 단어다.


 그 비참한 결론과 함께 사자는 언제부터였는지 오래도록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듯 제게 고정되어 있는 신과 눈이 마주친다. 신이 입을 벙긋거리며 무어라 말할 것 같았지만 사자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지금 주눅이 들었다고. 너희 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견고한 감정의 깊이와 섬세한 짜임에, 나의 감정이 너무 보잘것없어 견딜 수가 없다고.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예 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는 그렇게 멀어지지도, 다가서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날 이후 사자는 야근의 연속이었다. 이유야 뻔했다. 도깨비와 함께 있을 때 놓쳤던 귀신 셋이 원인이었다. 물론 그 일로 인해 상부에 사유서를 올릴 때 ‘부주의로 인한 귀책’이라고 적은 것이 더 화근이긴 했다. 어떤 부주의였는지 구체적으로 다시 서술하란 지시가 내려왔을 때에도 전과 똑같은 내용을 올려 보냈다. 사자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곳에 도깨비의 이름을 적었다간 일이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게다가 그 일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다가 기타누락자에 대한 얘기까지 올라가면 더욱 곤란했다. 사자가 피곤해짐은 물론이고, 도깨비에게까지 그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사자야 모범 저승사자로서 지금처럼 추가 야근과 노잣돈 일부 삭감 등의 징계만 받으면 끝날 일었지만, 윗사람들의 골칫거리 도깨비라면 그 사정이 달라졌다. 900년 동안 벌 받고 살면서도 도대체가 윗분들 무서워할 줄 모르는 도깨비에게 또 다른 벌이 더해진다면, 그건 정말 클 수도 있었다.


 그게 오늘도 사자가 12시가 넘은 시간까지 카페를 지키고 있는 이유였다. 커피라도 마시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아 쪼로록 빨대를 물고 빨아 당기는데, 카페 문을 열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온다.



 “선배님 또 야근이십니까?”



 후배 김차사였다. 사자는 여전히 빨대를 문 채 손만 들어올려 건성으로 인사한다.



 “요즘 야근이 잦지 말이십니다?”

 “그렇게 됐다.”



 사자는 마시던 커피가 바닥을 드러낸 후에야 상체를 들어 올렸다. 김차사는 종업원에게 주문한 아이스티 한잔을 들고 사자의 앞에 앉으며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연다.



 “아, 선배님 저희 사내 게시판에 도는 얘기 보셨습니까?”



 사내 게시판이라 하면 얼마 전에 신설된 익명 게시판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익명의 힘을 빌려 이것저것 난잡한 얘기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누구의 전생을 안다느니, 누구의 기억이 돌아왔다느니. 간혹 겁도 없이 상부를 욕하는 글들이 올라왔다가 조용히 사라지기도 했고. 후배 차사들 사이에선 재미있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던데 사자는 영 흥미가 생기지 않아 한두 번 들어가본 게 다였다.


 후배 김차사가 사내 게시판 얘기를 꺼내는 이유도 그 곳에 올라온 그저 그런 소문들에 대한 걸 전하려는 거겠거니 싶어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빈 컵만 빨대로 휘적거리던 사자는 느닷없이 들려온 익숙한 단어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보라는 듯 되묻는 사자에게 후배 차사가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거기에 도깨비 얘기가 올라왔다는 거 아닙니까. 선배님 도깨비랑 친하지 않으십니까?”

 “도깨비 얘기가 거기에 왜 올라와?”

 “요즘 도깨비 신부 주위에 귀신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모양인데, 그럴 때마다 도깨비가 나타나서 겁을 주는 바람에 귀신들이 꼭꼭 숨어 다닌다고 찾기 힘들다고 난리랍니다.”



 사자는 도깨비가 또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몰랐다. 사실 그날 이후 신과 말을 섞어본 기억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피한 것도 아닌데, 그냥 대화랄 걸 할 기회가 없었다. 사자는 계속 야근의 연속이었고, 집에 들어가면 쓰러져 자기 바빴으니까. 가끔 기타누락자를 만나고 온 건지 분명 방에 있었던 것 같은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신을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서 굳이 캐묻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사이 그런 일을 벌이고 다녔을 줄이야.



 “근데 거기에 댓글이 엄청 달려가지고 공지까지 올라갔다는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위에서 무슨 조치를 취하지 싶지 말입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얘기하는 후배에게 사자가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보라며 캐물었다.



 “저도 무슨 조치가 내려질지는 모르겠습니다. 게시판에서 워낙 난리들이니까 뭐… 도깨비 신부가 빨리 도깨비 검을 뽑게 하든, 도깨비에게 다른 벌을 내리든 하지 않겠습니까?



 벌? 벌을 내린다고? 사자는 갑자기 저가 다 억울한 기분이었다. 900년을 불멸에 살게 했으면 됐지, 또 무슨 벌을 내린다는 거야? 진짜 해도 너무한 거 아냐? 그럼 제 신부가 귀신들한테 당하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는 도깨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가만히 있으면 또 그건 그것대로 벌할 것 아닌가?


 울그락불그락 변하는 사자의 낯빛에 후배 차사가 그의 눈치를 살핀다.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사자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곤 제 품에 하나 남아있던 명부를 앞에 있는 김차사에게 건넨다. 영문도 모르고 그걸 받아 든 김차사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미안한데 그것 좀 같이 처리해줘, 그랬다.



 “예? 제가요?”

 “어. 일할 맛이 딱 사라졌어.”

 “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명부를 넘기시면…! 이거 들키면 또 징계 맞으십니다!”



 내리라 그러지 뭐. 사자는 답지 않게 반항심이 일어 저를 붙잡는 김차사에게 대꾸도 않고 카페를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매서운 칼바람이 휭 불어 사자의 얼굴을 때린다. 사자는 괜히 하늘을 한번 노려보다가 쓰고 있던 모자를 휙 벗었다. 메이드 인 헤븐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정말. 오늘은 자체 휴무니까 그런 줄 아십시오. 사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호기로운 기세는 집 앞에 도착함과 동시에 사라지고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문고리를 돌리기 직전 방금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제게 내려진 명부를 다른 차사에게 넘긴 것도 모자라, 대놓고 반항을 했다.


 드…들으셨을까? 사자는 저가 뱉었던 말들이 그분의 귀에 모두 들어 갔을지 걱정하며 지금이라도 다시 카페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아직 선약 시간이 안 됐으니까 도로 김차사에게 명부를 받아 일을 마치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집 안에서부터 시작된 비명이 느닷없이 사자의 귀를 파고든다. 사자의 온 감각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한다. 그리고 또 한번 들려오는 비명. 고함. 귀를 뚫을 것 같은 공포가 만들어낸 소리. 그 목소리가 너무나 명백하게 도깨비의 것이라서, 사자는 곧장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모두 꺼진 거실, 왠지 모르게 음산하게 감싸는 기운,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사자는 짧은 순간 온갖 상상을 다 했다. 신이 또 검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걸까. 그 새벽처럼?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까 김차사에게 들었던 것처럼 신이 무슨 벌이라도 내렸을까? 이렇게나 빨리?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렇게 머리를 스치는 수많은 생각을 뒤로 하고 사자는 신의 소리가 들리는 거실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앉아있는 신의 얼굴이 보였다. 사자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무… 무슨 일이야!”



 사자가 마주한 신의 얼굴이 공포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자가 한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사자는 저가 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양볼을 붙들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무슨 일이냐고!”



 그때 신이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비명 뒤에 이어진 외침.



 “좀비! 좀비다, 좀비!!”



 사자는 잠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귀를 통해 들려온 것이 분명 말이었지만, 그걸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좀비? 좀비라고?



 “으아아악! 뒤에! 좀비! 도망가! 아악!!”



 신은 제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쿠션을 들어 눈을 가리며 악을 썼다. 사자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제 등 뒤에서 형형색색 현란한 화면을 띄우고 있는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목과 팔이 꺾인 시체들이 사람들의 뒤를 쫓는 레이스를 벌이고 있었다. 저건 분명… 좀비 영화였다.


 맥이 탁 풀렸다. 사자는 양손으로 감싸고 있던 신의 얼굴을 거의 소파에 처박듯 던져버리곤 몸을 돌렸다. 신은 사자가 내던진 그대로 소파에 파묻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사자는 등 뒤에서 들리는 신의 비명이 한심해 입술을 깨물다가, 정말 한심한 게 누군가 생각해본다. 해야 하는 일마저 다른 차사에게 미루고 집으로 돌아와선 좀비 영화 보며 악을 써대는 도깨비를 걱정하고 있는 제 꼴이라니. 제 앞가림이나 잘할 것이지. 사자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목 뒤로 넘기며 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선 순간 저보다 먼저 제 방에 들어와 쿠션을 껴안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신의 모습을 마주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뭐야, 너!”



 사자가 문 밖으로 고개를 빼 거실을 확인했다. 방금까지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신의 모습이 당연히 없었다. 신은 쿠션을 더 당겨 안으며 말했다.



 “무서워. 같이 좀 있어줘.”



 무서워? 무서운 걸 알기나 해, 네가? 사자는 쏘아 붙이려다가 참는다. 이 자와 이런 식으로 계속 말다툼을 하는 것도 싫었다. 신에게 벌이 내려지는 걸 막으려고 매일같이 야근을 뛰는 사자의 속도 모르고, 저가 모르는 곳에서 여전히 기타누락자를 따라다니며 귀신들을 쫓아냈다는 신에게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행동들로 인해 자신에게 내려질 수도 있는 벌에 대해선 눈꼽 만큼의 걱정도 없이 저렇게 철딱서니 없게 날뛰는 오만방자한 도깨비를 걱정하는 일 따위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에게 칭얼칭얼 장난스럽게 달라붙으려는 신을 향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왜 나보고 같이 있어달래? 그렇게 무서우면 기타누락자한테 가든가!”



 이상한 전개였다. 좀비 영화를 보던 도깨비나, 그런 도깨비를 보고 느닷없이 혼자 짜증이 난 저나, 그리고 또 거기에 대고 기타누락자 얘기를 꺼낸 것도. 다 이상했다. 기타누락자의 얘기가 나오자 조금 전까지 가볍고 장난스러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그 방향을 바꿨다.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신의 표정도 굳어졌다. 마치 데자뷰 같았다. 사자는 이전에도 저 비슷한 표정을 본 적이 있다. 사자가 약과 감기, 그리고 신의 입술이 전해준 열기에 취해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때. 사자는 그때도 지금처럼 은탁의 얘기를 꺼냈었고, 신은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다. 어쩌면 지금이 조금 더 건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은 목소리를 선으로 표현한다면 아무런 굴곡도 없는 직선으로 표현될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지은탁 얘기 아니면 나한테 할 얘기가 없지.”



 그 고요한 신의 목소리에 사자는 되려 더 악에 받쳤던 거 같다.



 “어! 그래, 없어!”



 지지 않을 듯이 소리치는 사자를 보며 신이 다시 묻는다.



 “없다고?”

 “없어! 없다고!”

 “진짜 없다 이거지.”

 “그래! 몇 번을 말해!”

 “너 요즘 매일같이 야근 하는 것도 다 나 때문이고, 내가 지은탁 만나고 오는 것만 봐도 그 자리에 굳어버리면서. 내가 방 밖에서 무슨 소리만 내도 깜짝깜짝 놀라면서, 그래도 할 얘기가 없다는 거지, 너는. 내가 가슴만 살짝 움켜쥐어도 내 얼굴 살피느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금도 내 비명 한번에 뛰어 들어와서 나보다 더 놀란 얼굴로 악을 썼으면서. 그래도 너는, 나한테 아직도, 할 말이 없다는 거지.”



 신이 그 동안 제 눈에 들어왔던 사자의 모습을 관찰 일지처럼 읊는 것에 사자의 말문이 막힌다. 오히려 신이 말하는 자신의 모습에 그랬던가, 되짚기까지 한다.


 신은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사자를 올려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사자의 시선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옮겨진다.



 “그래. 네가 할 말 없으면, 나도 없어.”

 “자, 잠깐…!”



 사자를 지나쳐 방을 나가려는 신을 향해 사자가 붙잡을 듯 손을 뻗었지만 조금 늦었다. 간발의 차로 사자의 손가락 끝에 신의 옷깃만 스쳤을 뿐이다.



 “잠깐, 기다려!”



 모르겠다. 할 말이 없다고 한 건 자신인데, 왜 돌아서는 그를 붙잡자고 따라가는 건지. 사자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더 모르겠는 건 뒤를 따라 붙으며 기다리라는 제 목소리를 뻔히 들으면서도 잠깐도 멈춰주지 않는 신이었다. 사자는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잠깐 기다리라니까!”



 그때 앞서가던 신이 제 방에 들어서자마자 예고 없이 몸을 돌렸다. 사자는 하마터면 그의 이마에 그대로 박치기를 할 뻔했다가 간신히 발을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마보다 다른 것이 더 먼저 맞닿았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사자는 흠칫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자가 걸음을 물리는 걸 힐긋 내려본 신이 왠지 책망이 담긴 듯한 눈을 한 채 말한다.



 “기다리면.”

 “…….”

 “기다리면, 오긴 와?”

 “…….”

 “말할 생각이 있기나 해?”



 신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곤 긴 손가락으로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린다. 그 동작이 왜 그렇게 고단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사자는 이유도 모른 채 제가 잘못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너는 내가 기다려도 안 올 거야.”



 그 뻔하다는 듯한 단호한 말에 사자는 왠지 속이 뒤틀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저가 나를 어떻게 안다고, 뭘 얼마나 안다고 저렇게 확신을 하는 건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저가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사자는 오기를 부리듯 말한다.



 “내가 뭘 안 온다는 거야.”

 “그게 어디든. 너는 절대로 안 와. 너는 내가 어떻게 와야 하는지 다 알려줘도, 너는 절대로 안 올 거야. 그렇게 안 할 거야.”

 “뭐라는 거야. 말을 똑바로 해!”

 “그래? 똑바로 해볼까, 어디 한번?”

 “대체 무슨-”

 “좋아해.”



 심장이 덜컹거렸다.



 “내가 너 좋아해.”



 이번엔 아예 굴러 떨어졌다. 떨어진 심장을 다시 주워 담느라, 사자는 대답도 못하고 가만 굳어버렸다. 마치 아침 인사를 하듯 편안하게 말한 신의 목소리에 사자는 그렇게 일격을 당했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할 말을 찾기가 힘들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러냐고. 고맙다고.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까. 아니면 웃어 보여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뺨이라도 올려 붙일까. 사자는 머릿속으로 그간 수도 없이 봐 온 드라마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무엇 하나 도움 되는 게 없었다. 지금 사자의 눈앞에 서 있는 도깨비의 얼굴에 애써 떠올린 생각들도 자꾸만 지워졌다. 그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사자의 눈을 더 깊게 들여다 볼 때마다, 백지가 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긴 시간이었던 것도 같고, 짧은 시간이었던 것도 같고. 가늠이 되지 않는 시간이 흘렀을 때, 먼저 입을 연 건 신이었다. 그 목소리에 다소 힘이 없었다.



 “거봐. 넌 지금도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하잖아.”



 신이 등을 돌렸다. 또. 또 사자에게서 고개를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더 깊숙이. 영영 나오지 않을 동굴을 찾아 들어가는 것처럼. 그러고 나면 문을 닫겠지. 그렇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또 기다려 주질 않고. 사자는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그 순간 사자는 제 안에서 몰밀려오는 파도처럼 무언가 말하고 싶어진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물의 파동이 밀리고 또 밀려 거친 파도가 되어 결국 도달하는 것이 검고, 딱딱하고, 제 몸 하나 온전히 품어주지 않을 것만 같은 바위라 해도 그 물결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더 세게, 더 아프게, 있는 힘을 다해 부딪혀 철썩 소리를 내고 부서져버리고 싶은 것처럼. 사자는 그렇게 속에서부터 토해낸다.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버릴지라도 지금 내뱉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말을.



 “좋아해!”



 그의 모든 진심을 끌어 모아서.



 “나도! 나도 너 좋아해! 좋아한다고!”



 사자의 말이 돌아선 신의 등에 분명하게 부딪혔다. 그저 의미 없는 파도였으면 어쩌지. 저 바위처럼 단단한 등이 그대로 저를 외면하면 어쩌지. 이제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지. 사자가 그런 걱정에 주먹을 꽉 쥐는 사이, 신은 그에 반응하듯 사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돌아서는 신의 얼굴을 언뜻 본 사자는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이런 식으로 고백하게 된 게 너무 싫다. 어째서 도깨비랑은 이런 식으로밖에 안 되는 걸까. 늘 흥분하고,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오고, 하려고 했던 말은 하나도 못한다. 실제로 일어날 거라 생각은 못했지만, 사실 사자가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하곤 했던 이런 상황도, 적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만약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조심스럽고 어른스럽게 말하고 싶었다. 차분히 말을 준비해서 성숙하게.


 그런데 이게 뭔가. 이렇게 무언가에 떠밀리듯 주체할 수 없이 말을 쏟아냈다. 화를 내는 건지 악을 쓰는 건지 모르게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게다가 그걸 듣고 돌아선 도깨비의 표정은 또 뭐란 말인가. 세상의 종말을 들은 표정이 바로 저런 걸까 싶었다. 아무런 미동도 변화도 없는 표정. 그 굳은 표정이 의미하는 건 뭘까. 듣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듣고 싶지가 않다.



 “너 네가 날 어떤 표정으로 보는지 모르지?”



 제 발치만 내려다보는 사자의 머리 위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로는 그의 마음을 판단할 수가 없었다.



 “네 얼굴 보면 모를 수가 없어.”



 사자는 결국 고개를 들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제 형편없는 고백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똑바로 보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그와 눈을 맞췄을 때 사자를 향해 빙긋 웃고 있는 신을 볼 수 있었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아마 신사도 알걸.”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건지, 놀리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사자는 그 말을 들으니 새삼 또 울컥 무언가 솟아난다.



 “근데 왜-”

 “모른 척하냐고.”



 사자의 말을 탁 자른 신이 곧장 말을 잇지 않고 잠시 숨을 내쉬었다. 속으로 좀 더 적절한 말을 고르는 것도 같고, 그저 사자에게 말하기 막막해 하는 것도 같았다. 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야. 앞으로도 네가 말하지 않으면 계속 그렇게 모른척할 거야. 네가 무언가에 휘둘려서 선택하지 않게. 그게 나든, 다른 이유든.”

 “내가 휘둘린다는 거야?”



 신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저 나름대로 사자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을 단어를 고른다고 고른 것 같은데, 결국 사자에게 덜미를 잡히고 만 말꼬리 하나를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는지 신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그래. 넌 늘 너무 많이 휘둘려. 나한테도, 지은탁한테도, 내 고통에도. 심지어 너 스스로에게도.”



 신의 말에 사자는 조금 자존심이 상한다. 휘둘린다고? 내가? 신의 말을 흥분하지 않고 곱씹어보려고 하지만 자꾸만 속에서부터 하고 싶은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변명이라고 느껴도 좋았다.



 “넌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몰라.”

 “알아.”

 “아니. 몰라, 너는. 너는 알 수가 없어. 나는 너에 비하면….”



 사자는 말을 잇다가 잠시 숨을 골랐다. 혀 끝에서 맴도는 이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러나 고민은 짧고, 말은 다시 이어졌다.



 “이런 감정을 받아들인다는 게 나한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넌 절대 몰라. 너에 비하면 나는… 나는 정말, 방금 걸음마를 뗀 아이나 다름 없어.”



 이보다 더 정확한 말로 신을 이해 시킬 수가 없었다. 싫지만, 사실이었다. 사자는 감정에 있어서는 도깨비보다 절대적으로 뒤처졌다



 “900년 동안 경보에 달리기에 마라톤까지 완주한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한텐 이 모든 게 너무 어렵다고. 널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것조차 힘든데, 근데 너한텐 도깨비 신부까지 있잖아.”

 “그건-”

 “끊지 말고 들어.”



 말이 끊기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자는 신의 말도 듣지 않고 한번 터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네 말대로 휘둘리는 걸 수도 있어. 인정해. 근데 그게 뭐. 이제 좀 좋아한다는 게 뭔지 눈을 뜨려고 하는데 너한텐 정해진 운명이 있고, 그걸 거스르면 네가 계속해서 고통 속에 살고, 나는 그 속에서 널 벗어나게 해줄 힘이 없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안 휘둘려? 너라면 그럴 수 있었겠어? 근데 왜 나한테만…!”



 흥분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어느 순간 또 말이 엉킨다. 저를 재촉하듯 굴었던 신의 얼굴이 떠오르며 원망이 섞인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선 그 전에 마음 먹어야 했던 게 많았다고. 네 생, 네 고통, 그리고 네 도깨비 신부까지.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와 함께 오는 모든 것들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데… 그래서 나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것들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근데 넌 내가 그런 것 좀 고민하느라 늦었기로서니 그걸 못 기다리고 사람을 그렇게…!”

 “나도 쉽지 않아.”



 신의 한마디가 사자의 말을 멈췄다.



 “불사의 생. 그 속의 고통. 그리고 지은탁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안 쉬워.”



 그럴 것이다. 도깨비라고 뭐든 다 쉽진 않을 것이다. 사자는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신을 통해 직접 들으니 자신이 얼마나 신을 가볍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자신은 저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함으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것들만 보느라, 정작 그 모든 것을 껴안고 제게 오는 신은 보지 못했다. 신도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그걸 못 봤다.


 신의 입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고단한 숨. 멀고 먼 길을 돌아 마침내 한 곳에 도착한 그들을 알리는.



 “다 안 쉬운데. 그래도 그것보다 널 외면하는 게 더 안 쉬워.”



 말을 마친 신이 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자는 여전히 그의 방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혼자 어렵고 안 쉽다고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와서 내 손 좀 잡아줘.”



 사자를 향해 뻗어진 긴 손가락. 그 끝에서 피어 오르는 따뜻한 온기. 그걸 쥐어도 될까. 내가 그것을 손에 쥐고 있어도 되는 걸까. 사자는 머뭇거리며 신의 눈을 바라봤다. 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을 통해 전해지는 어떤 마음들이, 사자의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이래도 되는 건지, 괜찮은 건지 수많은 물음들이 그의 발목에 들러붙어 달랑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신의 눈만을 바라보며 그의 앞에 선 사자는 저를 향해 손바닥을 보인 채 내밀어진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체온이 다른 두 손이 포개지며 전기가 통했다. 진짜 전기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전기가 사자의 머릿속 무언가의 스위치를 깜빡 눌러버렸는지도 모른다. 몇 백 년 동안 꺼져있던 그것의 스위치를 누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자의 눈에 신의 입술만이 보일 리가 없었다. 이렇게 강렬하게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자신을, 사자는 낯설어 밀어내 보려고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신의 뒷목을 감싸고 있었다. 한 손을 내민 채 사자의 손을 붙잡고 있던 신이 그 행동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까지 보고, 사자는 눈을 감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신과 사자의 입술이 겹쳐졌다.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도 몰랐다. 입술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고개를 어느 방향으로 틀어야 할지도. 그냥 가만히 포개고만 있었다. 입술을 타고 전해지는 신의 온기가 좋았다. 그의 몸에서 만들어진 피가 돌며 따뜻하게 데워진 체온을 차디찬 제게 나눠준다는 그 느낌이 이보다 더 충만할 수 없다 싶을만큼 좋았다. 그래서 사자는 제 어깨를 살짝 붙잡고 떨어지는 신의 행동에 아쉽게 눈을 떴다.


 마주친 시선에 열기가 가득하다. 신은 그런 사자를 빤히 보다가 붉은 색을 띤 그의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훑으며 말한다.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건 걸음마 이상인 것 같은데.”



 그 말 속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약 오른다. 사자는 그게 보기 싫어 다시 그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동시에 아직 사자의 입술 위에 머물러있던 신의 엄지손가락이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잡아 벌렸다. 신의 혀가 사자의 입술을 스치며 침범해 들어왔다. 뜨거웠다. 입술을 맞댔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뜨거워서, 싫은 건 아니었지만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어쩔 줄 모르고 바둥거리는 사자의 등허리를 신의 큰 손이 쓸어 내린다. 뒷목을 시작으로 허리까지.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달래는 것에 사자가 그의 어깨를 꽉 감싼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아니. 하지 않기로 한다. 사자는 그저 저를 안은 두 팔과, 제가 안고 있는 단단한 어깨만 느끼기로 한다. 이제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 도망가지 않고, 더 깊게 파고 들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네게 닿을 수 있는 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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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드디어 길고도 험난했던 7편이 끝났네요.


참 오랫동안 붙잡고 씨름했던 편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끝내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네요.


사실 이번 편은 제가 생각하는, 사실상 계약조건 1부의 마지막이에요.

완결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굳이 나누자면 7편까지가 제가 마음속에서 정한 1부였거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해야 할 말도 많았고, 유난히 쓰기가 힘들었던 것 같네요.

내용도 여러번 뒤엎고... ㅠㅠㅋㅋ

그래도 제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전한 것 같아요.

그게 온전히 가 닿았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계약조건은 이제 새로운 관계에 접어든 깨비사자와 함께 8편으로 돌아올게요.

관계가 전환된 만큼 8편부터는 조금 다른 얘기가 흐를 것 같아서 저도 맘이 설렙니다.

그동안 넘나 사자의 얘기만 있었다면.. 이제 깨비의 얘기도 하고 싶구요.


이번에도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게 돌아오기를, 저도 바랍니다^_T!


불성실 연재 이렇게 기다리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__)



+아차 7편의 1/2편에 약간의 수정이 있었어요.

오타나, 여기저기 맘에 들지 않는 문장들이 많아서요.

내용상으로는 변화가 없으니 안 읽으셔도 되는데, 그냥.. 수정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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