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조건

5. 반려 동물 금지







 사자는 언젠가 도깨비가 했던 말처럼 자신에게 강박증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썼던 물건은 언제나 제자리에. 잠자리는 항상 깨끗하게. 물건의 각은 잘 맞추고, 면에는 흐트러짐이 없이. 그런 정리 정돈의 기본 정도로 강박증이라는 소리를 듣기엔 매우 억울했다. 그러니까 사자는 절대로 강박증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의 원칙을 잘 지키는 성격일 뿐인 거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고로 언젠가부터 기본을 갖추지 못하고 흐트러지는 자신의 방 풍경이 낯설고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게 사자의 원칙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펴놓고 갔던 이불 위에 누군가 앉았다 가기라도 한 듯 오목한 주름이 잡혀 있다든가, 책상 아래 깔끔하게 밀어 넣었던 의자의 방향이 틀어져 있다든가. 그런 건 사자의 방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사자의 손을 마지막으로 탄 것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근래에 사자가 아닌 다른 존재가 그의 방을 제 방처럼 활보하고 다니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사자는 마침 지금 그 존재에 대한 유력한 증거를 잡은 참이었다.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검은색 서류철. 그리고 그 위에 없는 척 숨어있는 검은색 털.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놓쳤을 그것을 사자는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잡아 올렸다. 자신의 머리카락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빳빳했고, 그렇다고 도깨비의 것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짧았다.


 의자를 밀고 일어난 사자는 그대로 문을 통과해 거실로 나갔다. 잡고 있는 털이 날아가기라도 할까, 손가락 끝이 다 하얘질 정도로 힘을 주고 나온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도깨비의 뒤통수를 향해 사뭇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개가 내 방을 다 망치고 있어.”



 뜬금없는 사자의 말에 얼굴을 돌리는 신의 동작이 생각보다 느렸다. 그보다 빨랐던 것은 신의 무릎 위에서 뒹굴고 있던 개였다. 녀석이 신의 왼쪽 가슴팍에 앞발을 턱 올려놓은 채 그의 어깨 위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세모꼴의 귀는 사자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뾰족하게 솟아있었다. 한발 늦게 얼굴을 돌린 신의 턱 끝에 녀석의 귀가 닿아서 둘 중 누구라도 꽤 간지럽겠다 싶은데 둘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닿는 것이 꽤 익숙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만에 저 둘은 저렇게 유별난 유대감을 형성해버린 것이다. 사자는 개의 턱을 살살 쓰다듬어주며 무슨 일이냐는 듯 태연한 눈으로 묻는 신을 보곤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제 그 개 내보낼 때도 되지 않았어?”

 “이따 비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대체 그놈의 비는 왜 맨날 오는데!”



 사자가 개를 내보내기 위해 문이라도 열면 갑자기 마른 하늘에 천둥 번개가 쳤다. 일기예보에선 매일 아침 화창한 날씨가 이어질 거라고 말하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뜬금없는 소나기가 이어진 것도 딱 일주일 째였다. 그 덕에 인간들 사이에선 기상청만 애꿎은 욕을 먹고 있는데, 이 이상 기후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저렇게 개와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제 속도 모르고 여유로운 도깨비의 모습에 사자는 분한 표정으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손가락 사이에 쥐고 있는 검정색의 짧고 빳빳한 털을 내민 거였다.



 “저 개가 내 방을 테러하고 있다니까! 개털까지 나왔다고!”

 “개가 있으니까 털이 나오지. 별 것도 아닌 걸로 유난이냐, 너는.”



 유난이라니. 사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수세에 몰려서가 아니라, 저가 할 말을 그가 대신 했기 때문이었다. 유난이라는 말은 느닷없이 방을 점령 당해 방 꼴이 어질러지는 걸 참아주고 있어야 하는 자신이 아니라, 이제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마음이 약해지는 도깨비를 향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명확하게 덧붙이자면 유난스러운 오지랖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이 오지랖 넓은 도깨비는 제 본성을 십분 발휘해 언제 나갈지 모를 개에게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신사야. 별 이상한 걸로 뭐라 그런다, 그치?”

 “그 이름 좀 부르지 마!”



 사자는 신이 개에게 이름을 붙여줬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뭣보다 그 이름 자체가 싫었다. 신사가 뭐람? 신의 말에 의하면 생긴 게 꼭 턱시도 입은 신사 같아서 신사라고 지었다는데, 처음 들었을 때 와 닿는 느낌은 그게 아니었다. 왠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가 뭔가 싶었는데 처음 신사의 이름을 들었을 때 덕화가 했던 말이 딱 사자의 께름칙함을 콕 집어냈다.


 ‘신사? 삼촌 이름이랑 끝방 삼촌의 저승사자 ‘사’자랑 합친 거야?’


 이름의 의미를 들었을 때 왠지 개운하지 않았던 게 덕화의 말을 듣자마자 탁 풀리는 듯했다.


 그 이후로 사자는 줄곧 그 이름을 반대하고 나선 거였다. 어쨌든 당분간 같이 지내게 될 텐데 ‘이거, 저거, 야, 너’라고 부를 순 없지 않느냐는 신을 향해 ‘신사’라는 이름만큼은 싫다고 으름장을 놨다. 물론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하는 이유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거, 저거, 야, 너’는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자를 향했을 때엔 문제없던 호칭이기도 했으니까. 당연히 신에게 그 부분에 대해서도 반박 의견을 분명하게 표했다. 자신은 그렇게 불렀으면서 저 개는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는 사자의 항의에, 신은 그러니까 안 된다는 대답을 했었다. 호칭이 겹치면 헷갈린다나.


 결국 어물쩍 신사라는 이름으로 개를 부르기 시작한 신은 사자가 매번 저렇게 넌더리를 내도 아랑곳도 않았다. 오히려 더 보란 듯이 ‘신.사.야’하고 음절마다 힘을 주며 부르기까지 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열을 내는 사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일부러 약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신사를 신사라고 하지, 신사를 신사라 부르지 말라고 하면 신사를 뭐라고 부르냐?”

 “아니, 꼭 네 이름이랑 내…!”



 재미있지도 않은 말장난에 뭐라 대꾸하려던 사자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봤자 입만 아플 게 뻔했다. 수준 낮은 대화엔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사실 한일자로 굳게 입술을 물었을 때엔 신이 ‘미안, 네가 웃을 줄 알았지’ 따위의 사과를 전해올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농담에 사자가 웃지 않을 때엔 대부분 그런 식의 싱거운 사과가 이어지곤 했던 게 그들의 패턴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째 게슴츠레한 눈길만이 사자를 향한 채였다. 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꼭 사자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자는 혹 자신이 그에게 다 들리도록 속말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바짝 긴장하며 허리를 꼿꼿이 했다. 긴장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고, 그 또한 티 내지 않기 위해 표정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었다.


 눈이 마주친 것 치곤 꽤 오래 말이 오가지 않았다. 뭐? 왜? 라고 눈짓으로 물으며 재촉한 건 사자였다. 천천히 입을 여는 신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하게 낮았고, 눈은 더 가늘어졌다.



 “너 혹시 신사라는 이름이 진짜 내 이름이랑 사자의 ‘사’자를 따서 지은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누구라도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이름이라고는 생각했다. 손쉽게 사자와 도깨비를 나란히 세트로 묶어버리는 불순한 이름이었다. 그게 싫은 거라고, 사자는 말하려고 했지만 신의 말이 먼저였다.



 “그게 아니고선 왜 이렇게 신경을 쓰지? 꼭 신사 이름이 진짜 그 뜻이길 바라는 것 같네?”

 “뭐라… 뭐?”



 당황스러운 나머지 사자는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사자가 할 말을 잃고 얼이 빠진 것을 보고 도깨비는 저가 정곡이라도 찔렀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혀를 찼다. 그리고 짐짓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하는 게 아닌가.



 “어허, 내가 친구의 깊은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거였구만.”

 “아니야.”

 “이보게, 친구. 자네가 날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이름 두 자에 그렇게 깊은 뜻을 부여하리라고는-”

 “아니라고!”



 사자의 고함에 신의 어깨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던 신사가 낮게 점프하듯 폴짝 뛰어올랐다. 애가 놀라지 않느냐며 답지 않은 애견인 흉내를 내는 신의 태연함에 사자는 다시 한번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더 말을 섞어봤자 수렁만 깊어질 게 뻔했다. 사자는 별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돌려 다시 제 방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는 신의 미소를 봤더라면 어쩌면 분해서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자가 말없이 방으로 돌아갔던 것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지지부진 의미 없는 언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가 싫었던 거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자가 다시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엔 무슨 이유에서인지 좀 전보다 훨씬 더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기운은 단연 분노에 가까웠다. 이번엔 왠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은 서늘한 기세를 느끼며 고개를 돌리는 신의 어깨가 긴장으로 조금 뻣뻣해졌다.


 돌아본 곳엔 예상대로 사자가 흉흉한 표정을 지은 채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신의 품에 안겨 사자를 보고 반갑다는 듯 혀를 내미는 신사를 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감히 저승사자의 물건을 두 번씩이나 훔쳐 가?”



 신이 한번에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말이었다. 앞뒤가 다 잘린 채 대뜸 튀어나온 말이기도 했거니와, 대체 누가 뭘 훔쳐 갔다는 건지.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한 신의 얼굴을 본 사자가 자신의 긴 검지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내 만년필이 없어졌다고!”



 그리고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이번엔 신사를 가리켰다.



 “범인은 이 개고.”



 사자는 없어진 만년필의 행방을 신사에게서 찾는 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신이 그 주장에 동의해주기엔 증거가 너무 빈약했다. 사건의 정황 또한 너무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신사는 아침부터 줄곧 저와 함께 있었는데 그 만년필이 언제 사라졌고, 사라진 지금은 어디 있단 말인가. 일단 지금 신사의 몸에는 붙어 있지 않았다. 신은 신사를 조금 더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녀석을 감싸주는 듯한 방어자세였다.



 “그걸 왜 신사한테 뭐라 그러냐? 잘 찾아봐. 어디에 처박혀 있겠지.”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그럼 더, 잘, 꼼꼼히 찾아보면 되겠네. 그러게 왜 그런 걸 흘리고 다녀.”



 신사를 두둔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만년필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사자를 나무라는 것 같은 말투였다. 대체 이 무슨 피해자에게 손가락질하는 상황인가.



 “이게 내 잘못이라고? 내가 흘린 거라고?!”



 사자는 서류에 싸인을 할 때마다 연필꽂이에서 꺼내 쓰는 만년필을 다른 곳에 흘리고 다닌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러니 사자가 어디에 흘려 놓고 잃어버렸다는 건 아예 성립조차 할 수 없는 가설이었다. 만년필에 발이 달려 더는 이 좁은 연필꽂이를 못 견디겠다고 스스로 사자의 방을 뛰쳐나간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가져간 게 분명하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 누군가가 새카만 눈을 깜빡거리는 저 개라는 것 또한 분명했고. 다만 사자의 확정과 달리 신은 그 생각에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듯 보였다.



 “신사가 가져간 게 아닐 수도 있지.”

 “그럼 뭐 네가 가져갔냐?”

 “난 당연히 아니지.”



 곧장 튀어나오는 부정에 사자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너 아니면 이 집에 이 개 말고 또 누가 있어? 심지어 얘는 전과까지 있어.”



 여기서 전과라는 건 당연히 신사가 세탁소에서 사자의 모자를 강탈했던 일을 말하는 거였다. 사자의 입장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의심이었다. 일주일 전에 자신의 모자를 훔쳤던 개가 이 집으로 들어왔고, 일주일이 지나 만년필도 없어졌으니 용의선상 1순위에 전적이 있는 개를 올리는 게 당연했다. 문제라면 심증만 있고 증거가 없다는 거였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신이 얄밉게 그 부분을 콕 집어냈다.



 “증거 있어?”



 차마 없는 증거를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 사자는 못마땅한 표정만 지었다. 신은 기세등등하게 신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전적이 있다고 그렇게 단정 지으면 안 되지, 이 의심 많은 저승사자야. 너 그거 몰라? 무죄추정의 원칙? 유죄판결이 나기 전까진 무죄로-”

 “아, 시끄러.”

 “세상 조용하게 말했다.”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신을 사자는 짜증을 감추지 않고 노려봤다. 당장 신의 눈앞에 저 개가 만년필을 훔쳐 갔다는 증거를 들이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는 게 한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때,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익숙하게 현관문을 통과해 익숙한 냉전 지대로 들어섰다.



 “삼촌들 또 싸워요?”



 덕화였다. 신과 사자의 소리 없는 대립쯤이야 이제 인이 박이게 봐 온 그는 꼭 철없이 다투는 조카들을 달래듯이 그들 사이를 중재했다.



 “불사의 인생 사이좋게 서로 이해하고 오순도순 지내도 모자랄 판에 왜들 이렇게 싸워요.”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싸우는 건데요? 그렇게 묻던 덕화는 갑자기 저를 향하는 사자의 냉랭한 눈빛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절로 꿀꺽 침이 넘어가는 싸늘함었다. 사자는 그 눈 그대로 덕화를 쏘아보며 소리치듯 물었다.



 “덕화 너! 내 만년필 가져갔어?”

 “예?”

 “내 만년필!”

 “아, 아뇨!”



 서슬 퍼런 눈빛 때문인지 잔뜩 겁에 질린 덕화의 대답을 들은 사자의 눈이 이번엔 신을 향했다.



 “이래도 그 개가 범인이 아니라 이거지?”

 “뭐… 증거는 없으니까.”



 평온한 얼굴로 대답하는 신을 향해 사자는 분이 솟구치면서도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틀린 말이라면 그걸 붙잡고 꼬투리라도 잡겠는데,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사자는 긴 눈썹을 파르르 떨며 어금니를 사리물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증거 찾아오면 어쩔 건데.”

 “어쩌고 싶은데?”

 “그 개 내보내.”



 왠지 목적이 결국 그거였나 싶은 조건이었지만,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이 집에 CCTV가 달려있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서 펜이 굴러 나온다 해도 그걸 신사가 가져갔다는 정확한 증거를 들이밀기는 어렵다고 봐야 했다. 짧은 순간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 신은 큰 고민 없이 답했다. 콜. 그 대답에 사자가 예리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감히 저승사자의 예지력을 우습게 봐?”

 “그럼 수고해, 명탐정 저승사자.”



 신사를 안고 방 안으로 사라지는 신과 알 수 없는 의지를 불태우며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사자의 사이에서 덕화만 영문을 몰라 덩그러니 남아있어야 했다.











 굳이 따지자면 사자가 동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다. 호불호를 따지지 않는다고 보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동물뿐만이 아니라 사자는 대부분의 존재를 그렇게 바라봤다. 선호한다고 말할 만큼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고, 불호한다고 말할 만큼 특별히 싫어하는 것도 없이. 그러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말은 뱉은 만큼 돌아오고 감정은 표출하는 만큼 책임이 따른다. 사자는 자신이 언제까지 이승에서 이 일을 하게 될지 알 수는 없었으나, 자신의 책임이 따르는 일을 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망자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일도 충분히 버겁고 무거운 책임이었다. 여기에 뭘 더 얹을 수 있겠는가.


 사자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더 이상의 책임을 만들지 말자.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그 말을 곱씹으며 제 앞에 나란히 앞발을 모으고 엎드려있는 신사를 바라봤다. 냉철함이 흘러 넘치는 예리한 눈빛이었다.



 “이봐, 개.”



 사자의 목소리에 신사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사자는 그 재롱에 반응해주지 않은 채 검지 손가락을 펴 신사의 얼굴을 가리켰다. 위압감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 같았으나 신사의 꼬리는 오히려 더 빠르게 붕붕거렸다. 놀아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사자는 토실토실한 궁둥이를 들썩거리는 신사의 모습에 아랑곳 않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에 숨긴 건지 모르겠지만 내 만년필을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거야.”



 신사의 고개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사자의 말을 저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너 저승사자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손가락질을 하며 눈을 빛내는 사자의 표정은 영화에서나 보던 형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사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라는 것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취조나 탐문이라고 하기엔 용의자의 허를 찌를 만한 핵심이 부실했다. 그렇다고 협박이라고 하기에도 어딘가 확신 없이 두루뭉술한 어조였다.



 “뭐, 너는 내 모자를 가져갔어도 별 일이 없긴 했었지만… 그것도 좀 이상하긴 하네.”



 부질없이 신사를 향하던 사자의 손가락이 천천히 오그라졌다. 별다른 수확도 없이 내려온 손이 저 스스로도 민망한지 사자의 입에서 괜한 헛기침이 터졌다. 아무 것도 모르고 혀를 날름거리며 그저 사자가 언제쯤 자기랑 놀아줄지 기대하고 있는 신사의 구슬알 같은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자신이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도깨비와 내기 아닌 내기를 벌인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사자는 자신의 예지력을 믿고 시간이 날 때마다 신사의 뒤를 밟으며 녀석이 만년필을 숨겼을 만한 장소를 찾아 다녔다. 만년필의 행방을 찾기 위해 신사가 방만하게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까지 모두 참아 넘겼다. 심지어는 사자의 침대 위에 올라가 등을 비비며 뒹굴거리는 것까지 주먹을 꽉 쥔 채 파르르 떨면서도 잠자코 지켜봤었다. 그렇게 놀다가 어느 순간 침대 시트 아래에서 만년필 같은 걸 꺼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자의 그 대단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3일이 지난 지금까지 그가 기대하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만년필은커녕 만년필 뚜껑도 보지 못했다. 가끔 ‘증거는 좀 찾았냐?’하고 슬쩍 묻곤 하는 신에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관심 끄라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 말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흐름에 슬슬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다 남은 일주일을 그냥 보내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일주일이 다 지나기 전에 사자는 도깨비와의 내기는 둘째치고 어떻게든 저 개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 후에 도깨비가 어떻게 나올지는 좀 골치가 아픈 일이었지만.


 사자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사는 사자가 앉은 소파 밑으로 사뿐사뿐 걸어와 그의 발부리에 대고 낑낑거렸다. 사자의 입에서 긴 숨이 터졌다. 한숨은 아니었지만 그의 복잡한 마음이 조금은 섞여 있는 듯했다.



 “그렇게 애교 부려봤자 소용 없어. 너는 일주일이 가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돼.”



 모진 말을 내뱉는 것 치곤 목소리에 다소 힘이 없었다. 사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신사는 그 목소리의 어조만 듣고 자신이 더 어리광을 부려도 된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사자의 하얀 양말 끝을 잘근 깨물었다. 원래는 진저리를 치며 발을 떨었을 사자지만 이번엔 웬일로 조용히 신사의 새카만 몸통을 내려보기만 했다. 생각에 잠긴 듯 보이기도 했다.



 “애초에 너는 이 집에 들어와선 안 될 운명이었어.”



 사자는 얼마 전 후배 저승사자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신사가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길에서 떠돌아야 할 개가 자신의 모자를 훔쳐 도깨비와 저승사자가 사는 집까지 쳐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개에 대해 좀 알아볼 심산으로 반려 동물의 혼을 담당하는 차사를 물어물어 만난 거였다. 얼마 전 고속도로 교통사고로 주인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개라는 사실과 떠난 주인의 이름, 그 이후 줄곧 떠돌이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얘기까지 듣던 후배는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그 사이에서 명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 여기 있네요. 2주 뒤에 길에서 동사하는 걸로 나오는데요?’

 ‘동사?’

 ‘네. 근데 이 개는 왜요?’

 ‘…아냐, 아무 것도.’



 처음 만났을 때 홀쭉한 배나 뼈가 도드라진 마른 등을 보고 직감적으로 얼마 살지 못할 개라는 건 알았지만 당장 2주 뒤라는 얘기를 듣고 사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쯤의 덕화나 신은 개가 너무 마른 것 같다며 이대로 내보낼 수는 없다고 사료까지 사들였을 때였다. 2주 뒤에 이 녀석이 길거리에서 동사할 예정이니 사료고 뭐고 그냥 지금 내보내라, 고 말한다면 개가 아니라 사자를 내쫓을 분위기가 아주 충분하게 형성된 그런 시기였다는 거다.


 물론 내쫓는다고 순순히 내쫓아질 사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자가 그걸 알았을 때 당장 신사를 내보내지 않은 것은 그때엔 그 스스로도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굶어 죽을 운명인 것도 아니고, 살 좀 찌워서 내보낸다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겠지. 아직 2주가 남았으니까. 내일이나 모레쯤 내보내도 생사의 운명이 바뀌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일주일이 흘렀고, 이제 남은 기간도 고작 일주일이었다. 어쩌면 덕화나 신이 신사를 집에 들인 것보다, 사자가 그렇게 시간을 끌었던 게 가장 큰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자의 입에서 이번엔 진짜로 긴 한숨이 흘렀다. 이래서 책임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건데.


 사자는 자신의 양말 끝이 다 늘어나도록 잡아당기다가 지친 듯 탁 놓아버리는 신사를 물끄러미 내려봤다. 제 운명도 모르고 하필 저승사자의 집으로 들어온 신사는 자신의 생사보다 지금 당장 사자가 저와 놀아주지 않는 것에 더 토라진 듯 보였다. 팩 고개를 돌려 동그랗게 몸을 말아버리는 걸 본 사자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일이야.”



 신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혼잣말이었다. 사자는 자신이 이런 일로 마음이 복잡해졌다는 사실조차 생소했다. 그 낯선 기분을 스스로 깨닫고 자각하기도 전에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니. 인기척이 들렸다기 보다는 그 인기척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드는 신사의 모습을 본 거였다. 현관문은 최대한 조용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지만 집에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귀신 같이 알아차리는 신사의 청력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몸을 돌려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문을 닫고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서던 것은 덕화였다. 거실까지 발소리를 죽인 채 움직이던 그는 소파에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사자와 눈이 마주치자 엄마야! 하고 본능적인 감탄사를 내질렀다. 과하게 놀라며 퍼덕거리는 몸짓에 사자는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꿈뻑거리며 무표정으로 말했다.



 “뭐 훔쳐갈 거 있어?”

 “예에?”

 “근데 왜 그렇게 들어와?”

 “아니… 그, 그냥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조용히 들어왔다가 가려고 했죠.”



 아무도 없는 거랑 조용히 들어왔다가 가는 거랑 대체 무슨 연관이 있지. 사자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덕화가 ‘삼촌은 어디 갔어요?’하고 신의 행방을 묻는 바람에 금방 의문을 떨쳐내야 했다.



 “나갔어.”

 “어디요?”

 “몰라. 안 물어봤어.”



 또 어딘가에서 오지랖 넓게 인간들의 삶에 관여하고 있거나, 도깨비 신부를 만나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사자는 후자를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모나지는 것을 느끼고 생각을 관뒀다. 대신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들어왔다가 가려고 했다는 덕화의 방문 목적을 다시 궁금해 하기로 했다,



 “넌 도깨비도 없는데 여긴 왜 왔어?”

 “아… 그… 어, 할아버지가 보일러 좀 확인해보라고 해서요.”

 “보일러?”

 “네, 겨울이니까… 삼촌들 추우면 안 되잖아요.”

 “그런 걸 네가 확인해? 점검해주는 사람들 부르면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저한테 꼭! 직접! 확인해보라고 해서요. 여기가 어디라고 막 바깥 사람들을 함부로 들여요! 안 되죠, 안 돼.”



 이런 게 자기 일 아니겠냐며 가슴팍을 퍽퍽 치는 덕화의 모습이 괜히 어색해 보였지만 사자는 그런가, 하며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럼 저 보일러 좀 얼른 확인할게요.”



 덕화가 그렇게 말하며 집 안쪽으로 향하려는 것을 사자가 불러 세웠다.



 “보일러는 지하에 있잖아.”



 사자의 말에 덕화의 다리가 멈췄다. 돌아보는 그의 얼굴엔 멋쩍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아, 맞아. 그렇지.”



 아하하하. 터지는 웃음 소리가 왜 그리 공허하게 들리는지. 덕화는 사자가 눈썹 사이를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고 잽싸게 몸을 돌렸다. 조금 급해 보인다 싶을 만큼 빠른 걸음으로 현관 왼쪽 편의 복도를 돌았다. 복도를 따라 쭈욱 들어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사자는 덕화가 복도 끝에 다다라 지하 보일러실로 통하는 문을 여는 소리까지 그저 무심하게 듣고 있었다.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그냥 들렸기 때문에 듣고 있을 뿐이었다. 덕화가 잰걸음으로 타닥타닥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것도, 단지 들려서 듣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다시 신사의 절도를 추적하는 것에 집중하려고 할 때, 우당탕탕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그 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신사였다. 사자는 보일러실에서 난 요란한 소리에 한 번 놀라고, 컹컹 짖는 신사의 소리에 두 번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하고 보일러실로 이동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아…!”



 문 앞에 서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참에서 발목을 짚고 주저앉아있는 먼지투성이의 덕화가 보였다. 사자가 놀란 눈으로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뭐야? 너 괜찮아? 굴렀어? 어쩌다가?”

 “아야… 궁금한 건 나중에 물어보시고 일단 부축 좀….”



 사자는 그제야 덕화의 상태가 보였다. 발목을 삐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대는 게 아무래도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가까운 병원으로 가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손을 뻗었던 사자는 덕화의 손이 닿기 직전 아차 싶어 황급히 손을 거뒀다. 그 바람에 사자의 손을 잡으려고 다리에 힘을 줬던 덕화가 다시 벌러덩 자빠져버렸다. 이번엔 허리까지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는 덕화의 모습에 사자가 난감한 듯 제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넣으며 말했다.



 “아, 미안. 내가 손을 잡는 건 좀 곤란해서….”

 “그럼 앰뷸런스라도 빨리 불러줘요!”



 나 죽는다며 칭얼칭얼 울어대는 덕화를 보일러실에 남겨둔 사자가 빠르게 거실로 돌아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순간 어디로 전화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앰뷸런스를 어디에서 불러야 하더라. 인간들이 긴급 구조 전화번호라며 외우고 다니는 번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세자리였나. 더듬더듬 생각하며 멍하니 서 있는 사자의 뒤로 덕화의 외침이 들렸다.



 “끝방 삼촌, 빨리요!”



 사자의 마음이 급해졌다. 누군가 다쳤을 때 앰뷸런스 같은 걸 불러본 일이 있었어야지. 사자는 다쳐서 죽은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많았지만 다친 사람을 병원에 데려가는 일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기만 꽉 쥔 채 입술을 깨물다가 무심코 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인간들의 긴급 구조를 기다리는 것보다야 지금 당장 도깨비가 눈 앞에 나타나는 게 더 빠르긴 했다. 대체 이놈의 도깨비는 지 조카가 다쳤는데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지금 인간들의 삶에 관여하거나 도깨비 신부랑 하하히히호호헤헤 할 때가 아니라고. 꼭 필요할 때 없는 이 도깨비야!


 사자는 도움 안 되는 도깨비 생각은 관두고 일단 전화부터 하기로 했다. 물론 어디로 전화해야 하는 건지는 아직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덕화에게 어디로 전화해야 하는 거냐고 물어볼 생각으로 돌아선 사자는 제 눈앞에 나타난 도깨비의 얼굴에 입을 떡 벌렸다.



 “무슨 일이야?”



 물어보는 신의 얼굴에 아직 바깥의 찬 기운이 묻어있는 듯했다. 갑자기 나타난 그의 모습에 놀라 어떻게 왔냐고 묻는 사자를 향해 신은 다시 한번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아, 덕화!”



 사자가 보일러실에 남겨둔 덕화에게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온 신이 계단 아래에서 울망울망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덕화의 모습에 쯧 혀를 찼다. 덕화는 신의 얼굴을 보자 아까보다 더 젖은 목소리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삼초온. 나 아포.”

 “걸을 수 있겠어?”

 “아니이이. 업어줘어어.”



 아예 작정을 하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에도 신은 그다지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업어달라는 말 같은 건 간단히 무시하고 덕화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벌떡 일으켜 세웠다. 왼쪽 발목을 딛는 순간 아프다며 도로 주저앉으려는 덕화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리곤 계단 위에서 얼이 빠진 채 서 있는 사자를 보며 말했다.



 “얘 원래 엄살 심해. 어릴 때부터 손가락만 베도 깁스하고 다녔던 애야.”

 “아….”

 “그러니까 그만 놀라고 따라 나와. 병원 가게.”



 넋이 나간 사자를 묘하게 안심시키는 말이었다. 물론 사자는 도깨비가 그만큼 사려 깊게 저를 위해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말에 마음이 놓인 것은 사실이었다.


 사자는 막 현관문을 나서는 신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때 사자의 발끝에 무언가 툭 부딪혀 휙 날아갔다. 바닥을 구르며 날아간 것은 까맣고, 반짝이는 물건이었다. 눈을 찌푸리며 그 앞으로 다가간 사자는 마침 자신을 돌아보는 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안 올 거야?!”



 신의 재촉에 사자는 급하게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리곤 주머니에 감추듯 챙겨 넣고 곧장 신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 순간에도 덕화가 아프다며 징징 울어대는 통에 등 뒤로 문이 닫히는지 마는지도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다.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거의 신에게 안기다시피 들어갔던 덕화는 나올 때엔 제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나왔다. 물론 왼쪽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아 절뚝거리긴 했지만 혼자 걷는 데에 무리가 있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아프고 욱신거린다며 훌쩍이긴 했지만 병원에서 나이가 지긋한 중년 의사에게 ‘다 큰 총각이 이런 걸로 그렇게 아파하면 어떡해?’라고 한 소리 들은 게 좀 무안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리가 다친 녀석을 혼자 운전해서 집으로 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신은 덕화의 차 문을 열어 운전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타. 집에 데려다 줄게.”



 덕화가 뒷좌석에 불편한 다리를 쭉 펴며 앉는 걸 지켜보던 사자도 천천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덕화는 자신이 계단에서 굴렀던 순간을 무슨 무용담이라도 되는 듯 늘어놓기 시작했다. 분명 계단을 디뎠는데 앞이 어두워서 그랬는지 발이 쭉 미끄러지더라며, 우당탕 구르는데 눈 앞에서 별이 보였단다. 나 이대로 죽는 건가. 끝방 삼촌을 진짜 인생의 끝방에서 만나게 되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철딱서니 없게 떠들었다.


 그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신은 계단 네 개 굴러 떨어졌다고 인생의 끝방을 생각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라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 시큰둥함은 덕화의 얘기에 과장이 많이 섞여있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병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내 조용히 가라앉아있는 사자가 신경 쓰여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덕화가 다친 것에 그 정도로 놀랐나. 고요한 옆 얼굴을 힐긋 바라본 신이 그를 향해 뭐라 말을 붙이려는 순간 사자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 정도인 걸 다행으로 알아.”



 차체에 울리는 사자의 목소리가 어쩐지 선득하게 느껴졌다. 그 말의 내용도 그랬다. 다행으로 알라니. 왠지 걱정이 담긴 말이라기 보다는 책망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그걸 느낀 덕화가 예? 하고 저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듯 되물었다. 사자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 대신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것을 덕화가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내밀었다. 운전을 하고 있던 신도, 뒷좌석에 앉아있던 덕화도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사자는 정면만 바라본 채 말했다.



 “내 만년필 가져간 거 너였지?”



 사자는 아까 집을 나서기 직전 현관 앞에서 주웠던 만년필을 꼭 쥔 채 뒷좌석의 덕화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사자의 시선이 저를 향하자 덕화가 급히 딴청을 하며 헛기침을 했다. 저기요, 그게요, 하면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덕화를 향해 사자가 다시 물었다.



 “왜 거짓말 했어?”

 “아니… 거짓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요. 그때 분위기가 너무… 끝방 삼촌이 하도 무섭게 물어봐가지고 놀란 마음에….”



 덕화가 일부러 작정하고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건 사자도 잘 알고 있다. 집에서 펜을 찾다가 우연히 사자의 만년필을 쓰게 됐고, 그걸 깜빡하고 가져갔다 말하는 덕화의 해명 또한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덕화가 발소리를 죽이며 집에 찾아왔던 것도 아마 저 몰래 그 만년필을 돌려놓고 갈 생각이었을 거란 짐작이 됐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우연히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엔 그럼 말을 했어야지, 하고 한 대 쥐어 박아주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대가 저승사자였다는 거다. 끝방에 세 들어 사는 평범한 삼촌의 만년필을 가져간 게 아니라, 저승사자의 만년필을 가져간 게 이 사단을 만들어낸 거였다.


 사자는 이승에서 생활하고 있어도 그 소속은 분명 저승이었다. 이승의 법도보다 저승의 법도가 우선순위로 적용되는 대상인 것이다. 그 저승의 법도라는 것은 하도 복잡하고 신비로워 사자 본인조차 다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 범위와 세력 또한 가늠하기 힘들었다. 저승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면 사자가 알든 모르든 그 대가는 치러졌다. 그건 사자가 괜찮고 말고를 떠나 그렇게 행해질 것은 결국 행해지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사자는 이번 덕화의 경우가 그 경우라고 생각했다. 저승사자를 가까이하면 인간은 결국 부정을 타게 돼있다. 그게 사자의 의지와 상관이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자는 만년필을 다시 제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 물건에 다시는 함부로 손대지 마.”



 서릿바람을 닮은 쌩한 목소리였다. 덕화가 뭐라 변명 같은 말을 꺼내려는 것을 신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얘기해봤자 좋은 소리를 듣지도 못할뿐더러 지금은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분위기 개선에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었다.


 결국 덕화를 집 앞에 내려줄 때까지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덕화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신이 몸을 돌렸을 때엔 그 뒤에 있던 사자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먼저 집으로 갔으리라는 생각에 신은 한숨 같은 것을 내쉬며 걸음을 내딛었다. 발끝에서 푸른 도깨비불이 일어나자 눈 깜짝할 새에 집 앞에 도착했다.


 문이 살짝 열려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간 신은 현관 앞에 우두커니 굳어있는 사자의 등을 보고 발을 멈췄다. 왜 이러고 있냐고 물으려다가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거실을 쭈욱 훑으며 움직이는 사자의 고개를 따라 신의 시선도 똑같이 이동했다. 그리고 뒤늦게 알았다. 누군가 집에 오기만 해도 쪼르르 달려 나오던 신사의 기척이 없다는 것을. 신보다 그걸 먼저 알아차린 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갔네.”



 단 두 글자였지만 그 주어가 무엇이고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한 말이었다. 신은 사자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을 바로 뒤에서 바라봤다. 며칠 동안 눈만 마주치면 신사를 내보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지만, 이 순간 사자의 등에서 보이는 것은 분명 홀가분함은 아니었다.


 신은 왠지 그에게 필요한 게 위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덕화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 이번에도 이어졌다. 다친 덕화에 대한 걱정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사자를 먼저 위로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진 것은 신사인데 어쩐지 사자에게 괜찮으냐고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야 너-, 하고 꽤 조심스레 입을 여는 신을 향해 사자가 언뜻 옆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아까 정신이 없어서 문을 제대로 못 닫았나 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사자는 신이 하려던 말을 듣지도 않고 그게 추궁일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신사가 사라진 걸 제 탓으로 여길 줄 알았는지 해명처럼 말했지만, 사실 해명이나 변명이라 하기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사자의 힘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작 나가라고 문 활짝 열어줄 때는 안 나가더니 이 틈에 나갈 줄은 나도 몰랐지.”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필 이 타이밍에,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줄은 몰랐다. 사자는 허전함을 느끼려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녀석이 제 발로 나가지 않았다면 결국엔 어떻게든 내보냈을 거면서. 아쉬움, 허전함, 섭섭함. 자신에겐 아무 쓸모도 없는 것들이었다.


 사자는 제 안의 어딘가에서 아물대는 불가해한 감정들을 털어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곤 그의 뒤에서 말이 없는 신을 남겨둔 채 방으로 향했다. 사자가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그의 걸음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신의 시선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자는 부쩍 말이 없었다. 원래도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다지만, 신사가 나간 지 나흘째 되는 날, 그는 평소보다 더욱 말이 없어져 있었다. 오며 가며 신을 마주칠 때에도 눈동자만 도로록 굴려 건성으로 눈인사를 하고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 때에도 어딘가 정신이 빠진 것 같은 꼴인 건 마찬가지였다. 드라마가 끝나도 끝난 줄 모르고 멍하니 티브이만 들여다보고 있는 게 가히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가장 심각한 건 밖에서 무슨 소리만 들려도 신경 안 쓰는 척 고개를 빼며 현관 앞을 살피고, 어딘가에서 개 짖는 소리라도 나면 벌떡 일어나 그 근원지 파악에 나선다는 거였다. 저 정도면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런 주제에 신사의 얘기라도 꺼내려면 짐짓 실뚱머룩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선을 긋는 거였다. 대체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인가. 지금도 샐러드 접시에 드레싱이 철렁철렁 넘치도록 퍼붓고 있으면서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빼놓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스테이크를 굽던 신이 이젠 저런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익숙하다는 듯 무던하게 말했다.



 “야, 저승.”

 “어.”

 “샐러드로 국을 만들어 먹을 생각인 거야?”

 “어?”

 “취향이라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좀 짜지 않겠냐.”



 고개를 설설 젓는 신을 보며 무슨 소리야, 했던 사자는 그릇을 넘친 샐러드 드레싱이 조리대 아래로 주르륵 떨어지고 나서야 쏟아 붓고 있던 드레싱 병을 바로 잡았다. 아. 나사 풀린 인형이 내뱉을 듯한 건조한 감탄사가 사자의 입에서 나왔다. 샐러드는 물론이고 엉망이 돼버린 조리대를 망연히 보고만 있는 사자의 옆에서 키친 타올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번에도 신이었다. 사자는 그걸 받아 들며 나름 고마움의 표시로 느리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신은 사자가 하얀 손을 적셔가며 한강이 되어 흘러 넘친 드레싱을 닦아내는 걸 가만 보다가 말했다.



 “그냥 찾으러 나서라고.”



 신이 뭘 말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만했다. 그런데도 뭐가, 하며 모르는 척을 하는 사자의 모습은 신에겐 괜한 고집처럼 보였다. 신은 사자가 자존심 같은 걸 내세우는 건가 싶었다. 자신이 내보내자고 했었는데 다시 찾아오기엔 민망하고 내키지 않는 건가. 그런 거라면 신이 대신 도와줄 수도 있었다. 어디 있는지 대충 말만 하면 내가 찾아 오겠다니까? 그 말에도 사자는 퉁을 놓으며 그랬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사자는 진갈색의 드레싱을 흠뻑 먹어 푹 젖어버린 타올을 쓰레기통에 던져 놓고 돌아섰다. 실로 오랜만에 신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말하는 거였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 내가 너무 이상해지고 있어.”

 “뭐가.”



 설명하자면 많았다. 하나, 저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조카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느낌의 인간이 친근해졌다. 둘, 하우스 메이트가 생겼다. 300년을 살며 누구와 집을 같이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지금은 그것에 꽤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셋, 심지어는 그 하우스 메이트랑 친구라는 걸 맺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더 설명할 게 없었다. 달빛 어스름한 밤에 친구냐 아니냐를 두고 목소리까지 높였던 걸 사자는 할 수 있다면 제 전생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고 싶었으니까.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사자는 자신이 불과 한 두 달 전과는 아예 다른 이가 돼버린 것 같았다. 지금의 제 모습에 적응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이 이제 저승사자로서의 일까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를 따라 나서지 않으려는 망자들에게 모든 존재는 태어나면 죽게 되어있고,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던 자신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왜 사라질 존재에 미련을 두고 있는 거냐고.


 사자는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이걸 다 설명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구구절절 말하기에 너무 길어서라기 보다는, 되도록 감추고 싶은 속내라서였다. 나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우니 더 많은 혼돈을 불러오고 싶지 않다는 그 말을, 신에게 하기가 싫었다. 사자는 결국 말하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됐다. 그 말이 사자의 입에서 나오자 신은 또 어휴, 하고 답답한 듯 혀를 찼다.



 “원래 저승사자는 너처럼 다 답답하냐?”



 조용히 좋게 넘어가려는데 속도 모르고 기어이 시비를 거는 신의 말에 사자의 눈도 그 얼굴을 쏘아봤다.



 “그러는 도깨비야말로 너처럼 다 대책도 없냐? 아주 그냥 짐승이 따로 없어! 내키는 대로, 본능대로,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순 그런 것밖에 모르지?”

 “뭐 짐승?!”

 “그래, 짐승!”

 “와, 나 진짜 처음 들어. 진짜 처음이야, 진짜!”

 “그거 의외네. 이렇게 짐승이 따로 없는데 내가 처음이라니.”

 “야!”

 “왜!”



 순식간에 부엌 식기가 달그락거렸다. 해보자는 거냐며 신이 본격적으로 자세를 바로 하려는 순간, 갑자기 사자의 기운이 맥 없이 팩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퇴진에 신은 항복인 거냐고 비웃어줄 요량이었지만, 사자는 그저 성가신 표정이었다. 가뜩이나 예민한데 도깨비까지 속을 긁어대는 것을 더는 대꾸해주고 싶지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등을 돌렸다.



 “말을 말자.”



 아침이고 뭐고 다 포기한 사자는 제 방으로 들어가 콕 처박혔다. 문밖에서 도깨비가 뭐라 투덜거리는 것이 들렸지만 그것도 곧 잠잠해졌다.


 조용한 방에 혼자 남으니 그를 괴롭히던 고민들이 혼재되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피곤함이 되어 다시 사자를 덮쳤다. 생각할 게 많으면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요 며칠 사자는 아주 몸소 체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육체 노동에 버금가는 에너지를 소모시킨다는 사실에 대해 보고서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그 보고서가 저 위에 계신 분에게까지 올라간다면 저승사자의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해 산재 처리를 받을 가능성이 생길 텐데. 물론 정신적 스트레스고 뭐고 아예 받지 않도록 일을 관두는 가능성 또한 생길 테고.


 복잡한 생각을 밀어내려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떠올리던 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검은색 수트를 꺼내 입었다. 오늘도 선약이 있었다. 침대에 늘어져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선약이 단 한 건뿐이라는 것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사자는 코트를 입고 모자까지 챙긴 후 문을 열었다. 밖으로 걸어 나오자 늘 그렇듯 거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신이 있었다. 사자는 그 모습을 못 본 척 입술을 실룩이며 지나치려 했지만 독서에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던 신이 먼저 알은척을 했다.



 “가냐.”

 “개 찾으러 안 간다고!”



 계속 같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다 보면 바로 이런 부작용이 생긴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말에도 마치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펑 터져버린 다는 거.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른 사자는 아 깜짝이야, 하고 놀란 눈으로 저를 보는 신의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이 물색없이 성을 냈다는 걸 알았다. 신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누가 뭐래? 난 그냥 일하러 가는 거냐고 말한 건데.”



 그래. 그랬겠지. 사자의 얼굴이 무안함으로 일그러졌다. 하얀 얼굴은 금세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신이 뭐라 더 말할 것이 민망했는지 거의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 등 뒤로 ‘너 그러다 망자들 헷갈리는 거 아냐?! 정신 챙겨!’하고 걱정인지 놀림인지, 여하튼 그 비슷한 말을 하는 신의 목소리는 듣지 않은 걸로 쳤다.


 굳이 신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사자는 오늘 제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알았고. 그래서 망자를 찻집으로 안내할 때까지 눈에 바짝 힘을 주고 긴장을 놓지 않았다. 망각의 차를 마신 망자가 들어온 문으로 되돌아 나가는 것을 봤을 때에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사고 없이 일을 끝낸 게 다행이다 싶었다. 일을 하는 내내 그렇게 긴장감을 모포처럼 온 몸에 두르고 있었으니 찻집을 나서면서 마음이 가벼워지고 맥이 풀린 건 당연했다.


 사자는 그래서 지금 제 앞에 보이는 게 헛것인 줄로만 알았다. 인간들은 귀신을 보고도 헛것을 봤구나, 하고 넘어가는 일이 허다하다는데, 하물며 하루 온종일 죽은 자들을 만나는 게 일인 사자에게 헛것이 보이는 게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사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눈꺼풀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헛것이라고 생각한 그것은 여전히 사자의 목전에 있었다.


 골목 끝에서 하얀 솜뭉치 같은 발을 아장아장 내디디며 걸어 나온 것은 아무리 봐도 신사가 맞았다. 고작 나흘 못 봤다고 그 모습까지 잊을 만큼 사자는 기억력이 안 좋지 않았다. 신사로 추정되는, 아니, 신사가 분명한 그 개는 아직 사자를 발견하지 못한 듯 골목 어귀를 어슬렁거리며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며칠 밥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듯 배가 홀쭉해져 있었다. 기껏 비싼 사료 사 먹였는데 아무 소용도 없네. 사자는 허망한 생각을 하며 입술을 물었다.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 신사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이 장난 같은 등장에 대해 의문을 품는 건 지금 사자에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 원인과 과정의 분석은 둘째치고 녀석을 불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사자에겐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원칙과 객관적 이성으로 따지자면 불러서는 안 된다. 그게 맞는 일이었다. 사자가 녀석을 부르는 순간 녀석은 저를 알아볼 테고, 그러면 또 그를 따라 나설 테다. 애써 풀어놓은 실타래가 다시 꼬인다는 거였다. 운명은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고, 죽음은 흘러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 사자는 그 지론에 여전히 많은 부분을 동의하는 바이고, 그렇다면 지금 고민할 것도 없이 신사를 등진 채 걸어가야 맞았다.


 그런데 그는 어쩐지 목석처럼 굳은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일 거리도 안 되는 일을 가지고 이리 재고 저리 재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마음을 먹고 녀석을 부르는 걸 결행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아까 신이 했던 말이 하필 이 순간에 다시 떠올랐다. 원래 저승사자는 너처럼 다 답답하냐. 사자는 그 말이 틀리지도 않았구나 싶었다.


 사자가 300년 만에 발견한 제 안의 우유부단함을 자책하는 사이, 그의 옆으로 대형 세단 한 대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기민하게 몸을 피해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부딪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골목길에서 그 속도로 달리는 것에 정신 나갔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때 사자는 그 차가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골목 끝까지 내달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골목이 끝나는 자리엔 신사가 여전히 땅에 코를 박고 있었다. 사자는 신사의 사인이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동사로 죽든, 교통사고로 죽든, 어쨌든 다칠 수는 있는 거 아닌가. 저 차에 치여 죽기 직전까지 부상을 입을 수도 있지 않은가. 사자는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제 일에 대한 관념이고 신념이고, 그런 건 그냥 뒤로 미뤄버렸다. 그는 개의치 않고 입을 뗐다.



 “신사야!”



 그가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신사의 모습이 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세단은 여전히 험악한 운전으로 타이어 타는 소리를 내며 골목을 통과하고 있었다. 사자의 목소리가 차에서 뿜어 나온 매연을 뚫고 길 위에서 되울렸다. 신사야!











 사자가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섰을 때엔 신과 덕화가 함께 있었다. 신은 사자를 향해 턱짓을 하며 짧은 인사를 건넸고, 덕화는 그를 보자마자 입안에 사탕이라도 문 듯 양 볼을 부풀렸다. 인사도 그 모습 그대로 거의 얼버무리듯 웅얼대며 했다.



 “아녀흐세여.”



 안 하느니만 못한 인사였다. 그 성의 없음에 사자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움찔거리며 무서워하긴 하면서도 여전히 입술을 내밀기만 했다. 덕화는 신사가 사라진 이후 사자에게 쭉 저런 태도로 일관했다. 사자가 고의로 신사를 내보낸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면서도 늘 신사를 구박했던 사자에 대한 일종의 앙갚음처럼 보였다. 물론 사자가 앞으로 다시는 제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냉대했던 것에 대해 좀 삐친 것 같기도 했고. 저가 사자에게 지었던 죄는 홀라당 까먹은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퉁퉁 입술이 부은 덕화를 보고 사자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넌 대체 뭘 잘했다고 맨날 그렇게 입이 튀어나와 있어?”

 “제가 뭘요.”

 “네 잘못은 생각도 안 나지, 아주?”

 “그러는 끝방 삼촌도 증거 못 찾으면 신사 안 내보낸다고 해놓고선….”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는 덕화를 향해 사자가 스읍,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입술을 물었다. 그 엄한 모습에 덕화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만년필 사건의 원인 제공자가 저라는 것이 그제야 생각난 모양이었다. 뒷말을 제대로 맺지 못한 덕화가 아물아물 목소리를 흐렸다.


 그때였다. 사자의 뒤에서 자박거리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린 것이. 톡, 톡, 톡, 톡. 경쾌하고 일정하게 바닥을 치며 나타난 발소리의 주인은 신사였다. 힘없이 떨어져 있던 덕화의 고개가 번뜩 튀어 올라왔다.



 “신사다!”



 한쪽 발을 절뚝거리면서도 휭하니 신사에게 달려온 덕화가 조금 말라 보이는 녀석을 안아 올렸다. 왜 이렇게 가벼워졌느냐며 울상을 짓는 모습이 누가 보면 아주 저가 다 키운 줄 알겠다 싶었다. 신사가 이 집에 지내는 동안 밥 챙겨주고 용변 치우던 건 도깨비와 사자가 다 했는데, 정작 신사의 귀환에 생색은 덕화가 다 내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런 허세와 과장이 덕화의 매력이기도 했지만.


 이산 가족 상봉이라도 한 것 같은 감동의 재회 장면을 바라보던 사자는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눈을 떼며 시선을 돌렸을 때엔 그를 바라보고 있던 신과 시선이 부딪쳤다. 사자와 신사를 번갈아 보던 신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 눈빛에 호응하듯 사자가 입을 여는데, 덕화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디서 찾았어요? 이제 안 내보낼 거예요?”



 한꺼번에 많은 걸 묻는 덕화의 말에 사자는 하나씩 좀 물으라고 일단 그를 진정시켰다. 사자도 설명하려면 제 머릿속으로 정리가 좀 필요했다. 어떻게 된 건지, 어디서 신사를 찾았는지, 이제 안 내보낼 것인지, 덕화가 물어본 것을 차분히 다시 떠올리던 사자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이 얘기를 덕화가 있는 앞에서 말해도 되나 싶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사자는 망각의 찻집을 나오는 길에 신사를 발견했고, 녀석을 향해 돌진하는 차를 보고 결국 신사를 불렀다. 용케 사자의 목소리를 들은 신사는 그 미친 질주의 차를 벗어나 무사히 그에게 달려왔다. 여기까지는 덕화에게 말해도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제 안 내보낼 건지에 대한 대답 부분이었다.


 사자를 다시 만난 신사는 반갑게 꼬리를 쳤고, 예상대로 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몸으로 경험한 모양인지 사자가 얼른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배를 주린 듯한 신사의 모습에 사자는 먼저 근처 편의점에서 강아지 간식 같은 걸 사서 나왔다. 녀석의 배를 채워주고 보니 정말 이대로 집에 데려가야 하나 싶었다. 차가 신사의 앞으로 달려들 땐 너무 놀라서 앞뒤를 따질 겨를이 없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막막했다. 신사가 저를 보지 못하면 어떻게 도망이라도 치겠는데, 녀석은 사자가 모자를 써도 그를 잘 볼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신사를 무작정 집으로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본능대로 움직이며 뒷일은 생각도 안 하는 도깨비와 자신은 달랐으니까. 사자는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그게 순서였다.


 반려 동물 담당 차사를 다시 찾아간 건 그래서였다. 일단 신사의 명부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자가 직접 손을 써서 신사를 구하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신사의 죽을 자리를 도깨비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렇게 큰 죄라고 할 수 없지 않겠나. 어쨌든 도깨비는 그런 짓을 밥 먹듯이 해왔으니까. 일이 틀어진다 싶으면 도깨비가 협박해서 그런 거라고 사유서를 올릴 참이었다. 야근과 철야가 병행되겠지만 어쨌든 하나의 방법이 되기는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신사의 명부를 다시 한번 보자고 요구한 사자는 뜻밖의 말을 전해 들었다.



 ‘헉. 선배님 벌써 아셨어요?’

 ‘뭘?’

 ‘선배님이 얘기한 그 개 명부 말소된 거요!’

 ‘뭐라고?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사자의 모습에 후배는 모르고 물어보신 거였냐며 펄쩍 뛰었다. 그는 자신이 본 희한한 광경에 대해 열변을 토하듯 말했다.



 ‘제가 아까 명부를 정리하고 있는데 글쎄 그 명부에 글자가 스르륵 사라지는 거예요.’

 ‘글자가 사라졌다고?’

 ‘예! 제가 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기타 누락자 이런 것도 아니고 아예 명부에서 글씨가 사라지더라니까요? 그게 말소된 거 맞죠? 저도 말만 들어봤었는데 직접 봐서 너무 놀랐어요. 그 왜, 이름이 바뀌면서 운명도 바뀌면 명부가 아예 말소돼버린다면서요.’



 명부의 말소에 대해 말로만 들어본 건 사자도 마찬가지였다. 운명이 바뀐다는 건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신의 장난이나 변덕, 그것도 아니면 마음 약한 도깨비의 개입 없이 스스로 바뀌는 운명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물론 아예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힘들기 때문에 운명을 운명, 이미 정해진 명, 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바늘구멍을 뚫고 정해진 것을 거스르는 경우가 있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름을 따라가는 운명이었다. 간혹, 아주 드물게, 이름을 바꿔서 제 명도 바뀌어버리는 일이 있다고는 했다. 그건 인간들이 흔하게 개명을 하는 것과는 다른 거였다. 제 운명을 담은 강의 흐름을 통째로 바꿀 만큼 그 인생에 잘 맞아 떨어지고,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운명의 역풍도 견딜 수 있는 강한 이름이라야 했다. 그런 이름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 것이었기에 사자도 여태 명부가 말소되는 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신사에게 벌어졌다니.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듣고도 안 믿기는 얘기를 인간인 덕화에게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얘기를 덕화에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사자는 그냥 그렇게 됐다며 싱겁게 말을 마물렀다. 그때까지 옆에서 가만 팔짱을 끼고 있던 신이 입을 열었다.



 “죽음이 다른 이름을 부른 덕에 산 거네.”



 덕화와 사자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신은 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승사자가 다른 이름을 부르는데 제 아무리 신의 운명이라도 그걸 어떻게 찾아.”



 사자의 밀알진 눈동자가 신을 담은 채 꿈뻑거렸다. 신의 말을 전연 예상도 못했다는 듯 어리둥절한 그 얼굴을 보고 신은 쩝 설타음을 냈다.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자면, 너 생각을 되게 크게 하는 편이야.”



 그렇게 말한 신은 심지어 꽤 시끄럽기까지 하다고 귓불을 긁적거렸다. 들리면 들리는 거지, 뭘 또 시끄럽대?! 사자가 윗입술을 달싹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집안에 귀가 밝은 이가 있어 피곤한 건 저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한탄하듯 뱉은 사자가 쿵쾅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서 덕화만 또 아무 것도 모르고 발을 굴렀다.



 “뭐야! 대체 뭔데 그래? 나도 궁금해! 알려줘!”



 그 말에 사자와 신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터졌다. 인간은 몰라도 돼!











 식탁 앞에 앉은 사자는 날이 밝으면 개의 충성심에 대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결심하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호기심을 품어본 적 없는 종류의 지식이었지만, 지금은 왠지 꽤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 이유라 하면 지금 자신의 무릎 위에서 내려갈 줄을 모르는 이 녀석 때문이었다. 공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신사는 사자의 허벅지가 침대 매트리스라도 되는 줄 아는 건지 아예 태평하게 잠까지 자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이후부터 신사는 사자의 곁에 딱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모습에 신과 덕화는 신사가 사자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라며 놀리듯 웃었고, 갑작스러운 신사의 충성심에 사자만 당황스러웠다. 사자는 신사가 참 보는 눈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보호자나 믿을만한 주인을 선택할 거라면 그래도 저승사자보다야 도깨비나 평범한 인간이 낫지 않겠는가? 개중에 골라도 하필 저승사자일 게 뭔가? 이름 한번 불러줬다고 너무 쉽게 충심을 보여주는 거 아니냐고.


 물론 사자도 신사에게 처음부터 제 다리를 허락한 건 아니었다. 처음 몇 번은 신사가 종아리에 매달리기만 해도 다리를 달달 털며 노골적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저승사자의 인내심보다 개의 끈기가 더 강하다는 것을 느끼곤 그 방법은 포기했다. 결국 녀석에게 무릎까지 내주고 만 사자는 신사가 잠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 그 작은 몸뚱이를 슬며시 들어 바닥에 내려놓는 걸 시도했다. 바닥에 몸이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다시 그의 무릎 위로 쏘옥 파고드는 신사 때문에 그 방법 또한 금방 포기했지만. 그러니까 사자가 신사에게 제 무릎을 내주기까지 꽤 복잡한 여정을 거쳤던 셈이다. 그 여정의 승자는 결국 신사였고.


 생각해보면 사자와 신사의 싸움에서 승자는 늘 신사였다. 처음 사자의 모자를 훔쳐갔던 것만으로도 사자의 1패가 선언되었다. 비록 모자를 다시 되찾긴 했지만 신사는 모자를 주고 집을 얻었으니 그것도 사자의 2패라고 볼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집을 나갔던 신사를 사자가 직접 데리고 오기까지 했으니 이게 3전 3패의 치욕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사자가 제 다리 위에서 느껴지는 뜨뜻한 온기를 애써 무시하며 푹 한숨을 쉬었다. 시원한 게 필요해서 이미 한 캔을 비운 맥주를 치우고 새로운 캔의 뚜껑을 땄다. 치이익. 듣기만 해도 갈증이 사라지는 소리였다. 그걸 곧장 입으로 가져가던 사자는 갑자기 휙 허공을 가르며 제 손을 떠나는 맥주 캔을 멍하니 바라봤다. 혼자 식탁을 가로지른 맥주가 어느새 식탁 끝에 나타난 도깨비의 손에 달라붙듯 착 감겼다. 신은 사자의 입으로 들어갔어야 할 맥주를 뻔뻔한 표정으로 쭈욱 들이키곤 크으, 개운한 소리를 냈다. 누가 보면 광고 찍는 줄. 사자는 눈썹을 들썩이며 어정쩡하게 열려있던 입을 텁 다물었다.


 사자는 신이 제 몫의 맥주를 가져가버린 탓에 하는 수 없이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의 다리를 침대로 이용하는 중인 신사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염력을 사용해 맥주를 꺼냈다. 시들한 표정으로 똑같은 캔을 따서 마시는 사자를 가만 보고 있던 신이 넌지시 물었다. 



 “모처럼 집안이 평안한데 왜 죽을상을 짓고 있나, 친구?”

 “죽을상이라느니 그런 표현은 좀 자제해줘.”

 “아, 미안.”



 신의 빠른 사과가 이어졌다. 그는 표현을 고쳐 다시 말했다.



 “왜 죽상이야?”



 이전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지만. 사자는 별 기대도 안 했기에 딱히 딴지는 걸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무시하는 사자를 보고 신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퉁겼다. 그 소리에 사자가 뭐라 입을 여는 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우리 계약서 수정해야겠네.”



 갑자기 엉뚱하게 튀어나온 얘기에 사자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신은 사자의 무릎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신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반려 동물 금지. 그거 없애야지.”



 아, 맞다. 신의 말에 사자는 자신이 직접 썼던 계약 항목을 떠올렸다. 그걸 쓸 때까지만 해도 제 손으로 그 계약서를 수정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괴로워하는 사자의 모습에 신이 위로랍시고 말을 건넸다.



 “신사 들어오니까 이제야 좀 평범한 집 같고 좋은데 뭘 그래.”

 “…이게 평범한 거냐.”



 신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자는 거기에 도무지 동의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300년 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중인데, 이게 평범하다고.”



 저승사자의 평범과 도깨비의 평범에는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게 흐르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사태를 보고 평범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저승사자의 무릎 위에서 개 한 마리가 세상 편하게 자고 있는데, 그게 어딜 봐서 평범이란 말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자의 마음이 다 읽히기라도 한 건지 신이 세상 이치를 모두 통달한 것처럼 말했다.



 “삶이란 늘 예측 불가한 것이지.”



 저렇게 말하지만 신 역시 900년 만에 나타난 도깨비 신부의 예측 불가함에 당황하는 중이라는 것을 사자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예측 불가함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신도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분명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신이 사자에게 삶이 예측 불가해서 싫으냐고 묻는다면, 사자 역시 단번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싫고 좋고를 떠나서, 사자는 300년 만에 제 앞에 나타난 혼란에 적응하기가 힘든 거였다. 평이하던 저승사자의 삶에 왜 갑자기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문제의 근원을 돌이켜 생각해보던 사자가 작게 중얼댔다.



 “여기서 너무 많은 연을 만들었어.”



 아무래도 그게 가장 큰 원인이지 싶었다. 여태 저승사자가 아닌 다른 이들과 인연을 맺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다른 저승사자들과도 그리 각별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다 보면 으레 생기는 동기애 같은 게 그들을 묶었고,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동질감과 측은함, 그런 게 고리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자가 마음을 먹고 제 의지로 만든 인연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떤가. 애초에 이 집에 들어온 것도 사자 본인의 의지였다. 한 푼 두 푼 모은 노잣돈으로 임대한 집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긴 했지만, 어쨌든 그게 도깨비와의 인연을 만들었다. 셰어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묶은 것 또한 사자였다. 그때엔 같은 집에 산다는 것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었다. 지금처럼 도깨비와 마주 앉아 맥주를 홀짝이는 사이가 될 거라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뿐인가. 도깨비는 자신을 시도 때도 없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사자는 그것에 익숙해졌다. 심지어 바라기도 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자는 손가락으로 맥주 캔의 입구를 따라 그리며 말했다.



 “난 이 일을 하면서 신경 쓰이는 게 없어야 해. 그게 내 일의 숙명이니까.”

 “…….”

 “그런데 그런 게 생기고 있다고, 지금.”



 관계를 정의하는 이름이 생기면 그 끈은 쉽게 끊을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이 그랬다. 명확한 이름이 생기는 순간 쉽게 잊히지도 않고 버려지지도 않는다. 저승사자에게 그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었다. 사자는 매일 이 세상을 떠나는 누군가의 기억을 잊게 하고, 그걸 버리는 일을 하는 존재였다. 그런 사자에게 잊히지 않는, 버리고 싶지 않은 게 생겼다는 거다. 덕화가 제 물건을 가져갔다가 다쳤을 때에도, 신사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느꼈다.



 “애초에 없었으면 몰랐을 것이 없어졌을 때의 허전함을 알게 돼버렸어.”



 사자는 신이 자신을 친구라고 부를 때에도 그런 걸 느끼곤 했다. 어느 순간 그가 자신을 떠난다면, 자신은 그 공허를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더 이상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 때 저를 찾아올 배신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는 신사의 이름을 불렀을 때와는 달리 돌아서는 신에게 ‘김신’이라는 이름을 외쳐 부르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고개를 들자 저를 바라보던 신과 눈이 마주쳤다. 사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에 와선, 이제 그건, 아무래도 좀 힘들 것 같다고.


 신은 말이 없는 사자를 향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가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때 신의 손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자에겐 이미 익숙한 광경이었다. 도깨비 신부가 그를 찾는 모양이었다. 신은 좀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희미하게 피어오른 연기만 남았다가, 그것조차 곧 사라졌다.


 사자는 허무한 눈으로 앞을 보며 맥주를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탄산감이 유난히 따가웠다.



 “거봐. 지금도 있다가 없어지니까 느끼게 되잖아. 빈자리를.”



 사자는 입을 닫았다. 말을 섞을 상대가 없으니 입술은 오로지 맥주를 마시기 위한 용도로만 열렸다. 맥주를 친구라 치고 한 캔, 두 캔, 세 캔, 늘리다 보니 어느새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빈 캔이 그의 앞에 꽤 많이 늘어섰다. 그가 친구를 늘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사자의 다리 위에 계속 붙어있을 줄 알았던 신사도 지친 듯 내려갔다. 신사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아무래도 소파인 듯했다.


 소파 위에서 다시 잠을 청하는 신사를 보던 사자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을 때보다 한 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 몰랐는데. 사자는 이제 슬슬 들어갈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빈 캔을 정리하려 몸을 돌렸을 때에야 그 뒤에 서 있는 도깨비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걸까. 기척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제 앞에 서있는 게 마치 환영처럼 흐렸다. 혼몽에 빠진 듯 말이 없는 사자를 보고 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마시고 있었네.”

 “술이 달아서.”



 침잠해 있는 눈동자에 비해 사자의 목소리는 비교적 또렷했다. 신은 그의 어깨 너머로 식탁 위에 놓인 빈 캔의 수를 빠르게 가늠해보다가 다시 말했다.



 “나 기다렸나.”

 “그냥 술 마신 건데.”

 “기다리면서 마셨네.”



 평소 같으면 뭐라 더 쏘아붙였을 사자가 어쩐지 잠잠했다. 신은 부러 놀리듯 샐죽 웃으며 말했다.



 “침묵은 긍정의 뜻?”



 농으로 건넨 게 분명한 말에 사자는 대답하려는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튀어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는 걸 아는 도깨비치곤 좀 늦었네.”



 외롭게. 뒷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혀끝에서만 굴렸다. 애초에 덧붙일 마음도 없었던 말이었다. 사자는 속에서 떠도는 말을 금방 떨쳐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무심한 얼굴로 신을 지나치려는데, 그런 사자의 앞으로 신이 튀어 나왔다. 사자가 저를 막아선 다리를 내려보다가 고개를 들자 눈앞에서 얼굴을 살짝 기울이고 있는 신이 보였다. 그는 사자의 말끔한 얼굴을 관찰하듯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선의 높이가 거의 같은 사자를 아래에서 올려보듯 허리까지 살짝 숙이고 고개를 더 비틀었다. 그 자세가 부담스러워지고, 닿아오는 시선이 뜨겁게 느껴지고, 또 그들의 사이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사자의 머리를 스칠 때쯤 신이 목소리를 냈다.



 “취했나?”

 “…내가 너야? 저 정도로 안 취해.”

 “근데 안 하던 짓 하네.”



 뭔 소리야. 이런 친밀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할 말이라기엔 신이 뱉은 말은 싱겁고 그 의미도 불분명했다. 사자가 몸을 비틀어 그의 옆으로 지나가려 하자 신이 다시 한 걸음 움직여 그의 앞을 막았다. 사자가 피곤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뭐야.”

 “그러게. 너야말로 대체 뭐지.”



 자꾸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는 신이 답답해서 사자는 짜증이 솟으려고 했다. 그걸 아는지 신이 곧장 말을 이었다.



 “부르면 되잖아.”

 “뭘.”

 “외로우면 날 부르면 될 거 아냐.”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일상처럼 말하는 신의 목소리에 사자가 그와 눈을 맞췄다. 자신이 또 그가 다 들리게 속마음을 말했나. 조금 놀란 기색이 엿보이는 사자를 보고 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의로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워낙 생각을 크게 하는 편이라.”



 사자는 어금니로 입 안쪽의 연한 살을 깨물듯 잘근댔다. 요즘 들어 신을 앞에 두고 방심하는 일이 너무 잦았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사자는 제 속마음을 단속하며 신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안 외로운데.”

 “외롭다며.”

 “내가 언제.”

 “네 마음이 말했는데.”

 “안 그랬는데.”

 “흐음.”



 결론이 안 날 말싸움이었다. 한쪽은 안 했다고 우기면 그만이고, 또 다른 한쪽은 분명 들었다고 우기면 그만인 대화였다. 그런 건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아는 신이 먼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사자의 마음을 쏘삭여 또 다른 속말을 들을 기세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사자가 제 속을 단단히 엄폐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자 신은 결국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안 외롭다 치고.”



 안 외롭다 ‘치고’라는 말이 거슬려서 사자가 지적하려는데 신이 그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앞으론 네가 안 외로워도 날 불러.”

 “내가 왜.”

 “내가 오고 싶으니까.”



 뜻밖의 얘기에 사자는 말하는 법을 망각한 것처럼 입술 사이를 살짝 벌린 채 굳어버렸다. 귀로 들은 말을 머리로 해석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사자에게 신이 꽤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르지 않으면 난 몰라. 어디에 있는지. 나를 기다리는지. 내가 필요한지.”

 “…….”

 “그러니까 네가 부르라고. 나를.”

 “…….”

 “늦더라도 올 테니까.”



 말을 잇던 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네가 생각을 남달리 크게 하는 편이라 굳이 소리 내서 부르지 않아도 내가 다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거든.”



 사자는 그의 얼굴 위에 흩어진 저 미소를 언젠가 한번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그때도 밤이었던 것 같은데. 인간들이 말하는 데자뷔라는 게 이런 느낌인가. 사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말을 마친 신이 몸을 돌렸다. 제 할 말이 끝나자 사자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허. 참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지은 사자는 아직 식탁 위에 남아있던 캔을 분리 수거함에 집어넣었다. 앉았던 자리를 말끔하게 치우고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돌아본 곳에 굳게 닫힌 신의 방 문이 보였다. 그가 한 말에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괜한 말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마음이 들날렸다. 무언가가 그의 가슴 한 구석을 한닥한닥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직하게 도깨비, 하고 불러본 것은 그 간질거림 때문이었다.


 방 문 너머는 조용했다. 사자는 그제야 실소했다. 역시. 오긴 뭘 와.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픽 웃으며 돌아선 곳에 도깨비가 서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신은 몸을 돌린 사자의 바로 코앞에, 거의 숨이 스칠 만큼 바투 붙어있었다. 마주친 시선에 등골이 다 오싹해 곧장 눈을 피하려는 사자의 눈동자를 치밀하다 싶을 만큼 끈질기게 들여다보며 말했다.



 “부르면 온다고 했잖아.”



 사자는 가시거리에 들어와 있는 대상이 너무 가까우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는 걸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예부터 사물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안 된다고 했던 선조들의 말이 다 이런 것 때문이었나. 보이는 것은 신의 동굴같이 깊은 눈동자가 다였고, 자신은 그에게 손가락 하나 붙잡히지 않은 채 그 동굴 안으로 몰밀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보고 있으면 한량없이 그 끝에 도달할 것만 같은 깊이였다. 초점이 맞지 않을 만큼 시야가 흐렸는데, 그 산란한 와중에도 신의 시선의 이동만큼은 또렷하게 보인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한참 사자와 눈을 맞추던 신의 시선이 천천히, 그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내려갔다. 그의 눈동자가 닿은 곳이 어쩌면 자신의 입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자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다잡는 것처럼 분연히 입을 열었다.



 “잘 자.”



 크지 않게 입술을 움직이며 뱉어낸 사자의 말에 도깨비의 시선이 다시 그의 눈을 향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더 마주했던 신의 시선이 눈꺼풀을 감는 동작에 의해 사라졌다. 신은 감았던 눈을 뜨며 사자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섰다.



 “그 말 하려고 불렀어?”



 좀 전 그들을 에워쌌던 것은 대체 뭐였나 싶을 만큼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사자는 거의 쥐어짜듯 응, 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신에게서 웃음 소리가 터졌다. 기분이 나쁘다거나, 비웃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사자의 말에 화답했다.



 “굿나잇.”



 신이 다시 제 방으로 사라졌을 때, 사자는 최대한 그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건 무심코 떠올린 것들이 또 신에게 흘러 들어갈까 봐서였다. 문을 닫은 사자는 그 문에 등을 기댄 채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조금 전까지 내내 호흡을 참고 있었던 것처럼 밭은 숨이었다. 사자의 오른손이 제 왼쪽 가슴 위로 올라갔다.


 사자는 심장의 박동을 느껴본 일이 많지 않았다.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진정 살아 있다고 느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살아있음의 증명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사는 오히려 생을 더 무덤덤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의 격렬한 고동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만큼 치열하게 제 존재를 뽐내는 심장같은 건 자신에게 없는 줄로만 여겼다. 그런데 이제 와서 튀어나올 듯 약동하는 제 심장이 사자는 무서울 정도로 낯설었다.


 머릿속으로 은은한 조명이 난반사 되던 도깨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 가까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사라지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쪽에 그늘을 만들던 곧은 콧날, 작게 달싹이며 뜨거운 숨을 뱉던 입술, 그런 게 너무 한꺼번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들을 떠올림과 동시에 사자는 자신의 심장이 이러다 정말 터져버리겠다 싶을 만큼 뛰는 걸 느꼈다. 사자는 이 심장 소리만큼은 제발 신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사자의 삶에서 진짜로, 정말, 가장,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직감이 그의 뇌리를 강하게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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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었죠. 분량이 길어서 오래 썼어요.

길면 나눠서 올리면 될 것을, 단번에 읽을 때의 호흡이 끊기는 게 싫은 제 이상한 고집의 결과입니다 또르르

*깨비사자의 텔레파시 설정을 좀 더 확장했어요. 서로 텔레파시로 부르면 들을 수 있는 걸로. 텔레파thㅣ..그것은 LOVE니까..♡

*늘 그렇듯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__) 달아주시는 댓글들 정말 소중하게 읽고 또 읽곤 해요. 라부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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