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조건
3. 식사는 각자 알아서 챙기기
냉장고가 텅 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멀컹하게 물크러진 야채와 과일을 꺼내고 나자 텅 비어버렸다. 요 며칠 일이 바빠 먹는 것에 제대로 신경을 못 썼더니 이 모양이었다. 하필 배가 고픈 이 순간 먹을 게 없을 건 또 뭐람. 사자는 냉장고 문을 붙잡은 채 머릿속으로 보기를 만들었다. 1번, 굶는다. 생각과 동시에 뱃가죽 안이 쿠릉쿠릉 요동을 쳤다. 사자는 곧바로 거부 반응을 나타내는 신체의 뜻을 받아들여 첫 번째 보기는 과감히 지워버렸다.
그렇다면 2번, 버리려고 꺼내 놓은 야채와 과일 중 먹을만한 것들을 고른다. 사자의 고개가 싱크대 옆으로 돌아갔다. 대리석 상판 위에 올려둔 야채 중 제 본연의 초록빛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어 보였고, 본디 상큼해야 할 과일은 이제 거의 발효된 식초에 버금가는 향을 풍기고 있었다. 저걸 먹으면 오늘 밤 변기 위에 앉아서 자야 할지도 몰라. 사자는 두 번째 보기 역시 미련을 두지 않고 지워버렸다.
마지막 3번, 장을 보러 간다. 이 시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긴 했다. 그럼에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역시 귀찮다는 이유 때문이리라.
사자는 직접 마트를 가지 않고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덕화를 보낼까. 물론 그 방법을 쓰려면 만들어진 음식을 먹어볼 줄이나 알지, 재료에 대한 지식이라곤 조금도 없는 재벌 3세의 형편없는 장보기 솜씨를 감안해야 한다는 단점이 따라왔다. 풋내가 나는 오이를 맛봐야 하고, 껍질이 질긴 샐러리를 턱이 빠지도록 씹어먹어야 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덕화 보다 지식이 많고 노련한 눈썰미를 가진 자가 있다면 좋으련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사자는 순간 휙 스쳐가듯 떠오르는 도깨비의 얼굴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도깨비? 지금 도깨비를 떠올린 건가? 사자는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제 이마를 툭툭 치며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아무리 급하기로서니 그 자한테 자신이 먹을 음식을 맡길 수는 없었다. 대체 뭘 사올 줄 알고. 게다가 언제부터 그런 걸 부탁하고, 부탁 받는 사이였나.
“뭐하냐?”
도깨비라는 이의 천성은 늘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걸까. 그리고 자신은 왜 매번 그것에 놀라는 걸까. 사자는 신의 등장에 부르르 떨렸던 제 몸짓이 민망해서 붙들고 있던 냉장고 문을 다소 신경질적으로 놓아버렸다. 탁 소리가 나며 닫히는 문을 보고 신이 그래서 문짝이 부서지겠냐, 하고 실없는 소리를 했다. 사자는 원한다면 아예 냉장고가 통째로 부서지는 걸 보여주겠다고 답하며 돌아섰다. 그길로 곧장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입고 장바구니를 챙겨 나왔다. 어느새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도깨비가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어디 가?”
“마트.”
“잘 갔다 와.”
사자는 어, 하고 답하려는 듯 입술을 뗐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져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문득 이런 일상적인 대화의 주고 받음이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인사를 하고 다녔더라. 그 시작이 잘 떠오르지 않기는 하지만 확실히 언젠가부터 ‘잘 자’라든가 ‘다녀 와’라든가, 퍽 다정한 인사를 나누곤 했다. 심지어 귀가가 늦어지면 오늘은 늦었네, 하고 낯간지러운 참견까지 서슴지 않았다.
사자는 조금 전 냉장고 앞에서 했던 것처럼 제 이마를 가볍게 톡톡 쳤다. 머리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엔 대답 없는 그를 돌아보고 있던 신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사자는 갑자기 모든 것이 어색해진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곧바로 눈을 피했다. 특유의 쌀쌀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사자는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어 젖혔다. 옷깃 안으로 후욱 스며드는 바람이 그리 차갑지가 않았다. 오늘은 날이 꽤 풀린 모양이었다. 인간처럼 걸어가는 것을 택한 것은 날이 그만큼 좋아서였다.
코너를 돌아 마트 입구로 들어서려던 사자의 걸음이 뚝 멈췄다. 유리문 바로 옆의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도깨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 따라 왔냐?”
신은 황당한 얼굴로 묻는 사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며 답했다.
“따라오다니. 나 그렇게 한가한 도깨비 아니다.”
“엄청 한가해 보이던데.”
“나도 살 거 있어서 온 거야.”
“어련하시겠어.”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사자는 자신이 도깨비 신부에게 갈까 봐 따라왔을 게 뻔한 그의 속 뜻을 비웃으며 도깨비를 지나쳤다. 도깨비가 제 뒤를 따라오든 말든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익숙한 동작으로 카트를 뽑아 밀었다.
사자가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유기농 청과류 코너였다. 샐러드로 만들어 먹는 채소는 특별히 유기농으로 신경 써서 고르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생으로 먹는 거라 저승사자 특유의 깐깐한 눈썰미가 발휘됐다. 이파리는 숨이 죽지 않고 푸릇한지. 무르지 않고 단단한 강도를 가지고 있는지. 너무 익지는 않았는지. 그런 것들을 꼼꼼하게 확인하던 사자의 뒤에서 어차피 배 안에 들어가면 다 똑같을 거 유난을 떤다고 비아냥거리는 도깨비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더 세심하게 살폈을 거다.
사자는 고심 끝에 고른 양상추를 카트에 집어 넣다가 그 안에 보이는 에이플플플러스 등급의 한우 등심을 보곤 쯧 혀를 찼다.
“그러는 너는 참 유난스럽지 않은 입맛이라 공이 하나 더 붙은 한우를 샀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소고기는 한우랑 수입산이랑 천지 차이야.”
“어차피 남의 살 벗겨 먹는 거 한우나 수입산이나 다 똑같지. 야만스러운 도깨비.”
사자는 자신이 고른 양상추를 마뜩잖게 보며 상스러운 식재료라고 한마디 덧붙일 도깨비를 상상하며 몸을 돌렸다. 그 딴지에 대비해 머릿속으로 네가 고른 고기에서 새어 나오는 시뻘건 핏물이 더 상스럽다는 뒷말까지 준비했다. 예상과 달리 도깨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탓에 미리 준비한 그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지만.
평소답지 않게 말없이 조용해진 게 이상해서 돌아본 사자의 뒤엔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 제 뒤에 있던 도깨비의 자취가 사라졌다.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눈을 돌려 주위를 살피려던 사자는 제 눈앞에서 언뜻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곤 그제야 그의 행방을 알 것 같았다. 900년을 기다려 만난 그 도깨비 신부, 사자에게는 기타누락자에 불과한 그 아이에게 소환 당한 모양이었다.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지는 연기를 멍멍하게 보던 사자의 시선이 무심하게 돌아갔다. 그는 샐러드용으로 나온 당근을 집어 들며 마침 귀찮던 참이었는데 도깨비 신부가 참 적절한 타이밍에 소환을 했네,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생각과 달리 마음이 곤두서는 건 왜인지 모르겠지만.
“김차사?”
제 이름은 아니지만 저를 부르는 것이 분명한 호칭에 카트를 밀며 걸음을 옮기던 사자가 멈춰 섰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자와 같은 기수의 저승사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는 사자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고 나서야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 맞네! 여기서 다 만나냐.”
작업 현장이 아닌 곳에서 만나게 된 동기 녀석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사자는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나 얼마 전에 이 근처로 이사 왔잖아.”
“아, 그래?”
몇 달 전에 전세 계약이 끝나서 다른 집을 구해야 한다고 우는 소리를 하던 걸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말만 그렇게 하지 별로 절실해 보이진 않아서 그냥 저냥 듣고 넘겼는데 결국 새로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사자가 고개만 끄덕이고 별다른 반응이 없자 동기는 이번엔 매매로 입주했다며 묻지도 않은 자신의 주택 사정을 낱낱이 알렸다.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자였다. 자기 얘기만큼이나 남의 얘기도. 사자는 적당히 맞춰주자 싶어서 ‘이 동네 주택 매매가가 꽤 높을 텐데?’하고 물었다. 사자가 물어올 걸 기다렸다는 듯 그는 그동안 모은 노잣돈이 꽤 쏠쏠했다는 답을 했다. 결국 그 말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같은 해에 들어온 사자는 여전히 전세를 전전하는데 자신은 제 집 마련을 했다는 것.
거기까지 들어준 사자는 이만하면 됐다 싶어 그럼 다음에 보자,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근데 도깨비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하는 질문이 들려오는 바람에 다시 동기 녀석과의 흥미 없는 대화에 섞여 들어야 했지만.
“방금 너랑 얘기하고 있던 거 도깨비 맞지? 저번에 누가 너랑 도깨비랑 얘기하는 걸 봤다고 하길래 긴가민가 했는데, 진짜 아는 사이야?”
사자는 얼마 전 병원에서 도깨비와 마주쳤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사자를 알아보고 알은체를 했던 차사들이 한 두 명에게만 말했어도 꽤 소문이 났을 거다. 이래서 도깨비와 같이 있는 걸 보이기가 싫었던 건데.
물론 도깨비와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굳이 떠벌떠벌 퍼뜨리고 싶은 일도 아니었다. 저승이라는 곳이 그렇다. 별로 재밌는 일이 없는 곳이라 별 것 아닌 소문도 부풀리기 좋아했다. 사자는 괜히 피곤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 말을 얼버무렸다. 동기 녀석은 그런 사자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떻게 알게 됐느냐, 도깨비 성격은 어떻느냐, 소문처럼 진짜 그렇게 심술을 많이 부리느냐 등등. 사자가 그저 멋쩍게 웃으며 가만히 입을 다물고만 있자 그는 싱겁다는 듯 눈썹 사이를 찡긋거렸다.
“부럽네, 부러워. 도깨비랑 친구도 맺고. 나도 도깨비 소개 좀 시켜주라.”
그는 저승사자 같은 말단 직급이 도깨비와 연을 맺은 것 자체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 다소 철딱서니 없는 태도에 사자는 기분 상한 티를 숨기지 않고 제 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친구는 누가 친구야.”
“둘이 얘기도 하고 친해 보이더만 뭘.”
적당히 좀 하지, 진짜. 사자는 늘어지는 대화에 피곤함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내뱉는 대답에 자연스레 짜증이 스몄다.
“뭘 친해. 말 거는데 그럼 무시해? 도깨비랑 친해서 뭐 좋을 거 있다고.”
스스로 말을 뱉고서도 말끝이 필요 이상으로 곤두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구태 정정하진 않았다. 소문의 중심에서 주목 받는 걸 좋아하는 동기 녀석이 도깨비 좀 소개시켜 달라고 말하는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고, 아쉬운 대로 저와 도깨비의 소문이나 열심히 퍼뜨리고 다닐 그 값싼 주둥이도 짜증스러웠다. 사자의 불편한 심기를 느끼고 알아서 이만 꺼져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이렇다 할 대답도 없이 두 눈을 꿈뻑거리기만 했다.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던 건 그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뒤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자는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고도 알았다. 제 뒤에서 느껴지는 홧홧한 기운은 분명 도깨비였다.
“어… 저기, 나 이만 갈게.”
사자는 도깨비의 기운에 눌려 자신에게 어색한 인사를 남기고 황급히 사라지는 녀석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제 뒤에 있는 도깨비를 돌아보고 있었다. 신의 머리 위로 타오르듯 일렁거리던 푸른 빛은 사자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러졌다. 신은 왠지 싸늘한 눈으로 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자는 잠깐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해야 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사라졌던 도깨비가, 하필 이 타이밍에 또 갑자기 나타났다 이거지? 사자는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도깨비의 굳은 표정만으로도 자신이 뭔가 해명해야 하는 분위기라는 건 눈치로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을 지나쳐가려는 신을 불러 세웠다.
“야, 저기-”
“무시해.”
신은 사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내가 말을 걸어도, 안 걸어도. 이제 무시하라고.”
사자는 방금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왔던 말과 비슷한 말을 듣곤 그제야 분명히 알았다. 자신이 해명해야 하는 게 어떤 부분인지. 저거구나.
“그건 그런 뜻이 아니라-”
“맞는 말이야. 내가 배려가 없었네. 도깨비랑 친해서 좋을 거 없지.”
신의 시선이 잠깐 사자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냉랭한 표정에 사자가 할 말을 잃은 사이 푸른 도깨비 불 뒤로 신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번엔 소환 당한 게 아니라 그 스스로 가버린 거였다.
도깨비가 사라진 자리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던 사자의 마음에 벌컥 억울함이 치솟았다. 대체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가. 그 상황에서 그 말을 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싶었다. 심지어 잘 생각해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신과 도깨비가 친구인가? 그들의 사이가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이였나?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관계라서 난감한 건 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좀 얼버무렸기로서니 그렇게 세상 다 때려 부술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사라져버린 도깨비가 이해되지 않았다.
사자는 도깨비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다가 이내 눈을 돌려버렸다.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카트를 밀었다.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건 애써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마트에서 도깨비의 식재료까지 몽땅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온 사자는 왜 자신이 그의 것까지 다 챙겨 와야 하나, 부아가 나다가도 일단은 그것들을 냉장고에 쓸어 담았다. 애꿎은 음식이 죄는 아니잖아. 그렇게 합리화하며 장 봐온 것들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도깨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자가 일부러 우당탕탕 소리를 내는 것이 거슬려서라도 나와볼 법했으나 다 채워진 냉장고의 문이 닫혔을 때에도 신의 방은 조용했다.
내가 신경 쓸 거 없다. 마트에서 받아온 종량제 봉투를 탈탈 털어 접으며 사자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도깨비가 들은 상황이 다소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건 납득이 갔으나 그것에 대해 자신이 일일이 설명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사자는 반듯하게 접은 봉투를 싱크대 서랍 어딘가에 넣어 놓고 스스로에게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도깨비와 나는 친한가? 친구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인가? 사자의 답은 ‘알 수 없음’이었다.
도깨비와 사자의 사이는 그랬다. 친하다고 할 만큼 가까운 사이인지 불분명했다. 사자가 마트에서의 그 상황을 왜 해명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자는 어느새 도깨비의 방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깨닫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까? 의식하는 사이 저의 생각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제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자는 황급히 수습하려고 했지만 한번 떨어진 입은 자꾸 제멋대로 말을 뱉었다. 그의 말이 도깨비의 방 문을 향해 노크처럼 퉁퉁 울렸다.
“아까 한 그 말은 피곤한 상황을 만들기가 싫어서… 아무튼 뭐, 기분 나빴다면 미안….”
거기까지 말을 잇던 사자가 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기분이 널을 뛰었다. 자신이 도깨비에게 왜 미안해야 하나 싶다가도, 또 좀 진짜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어느 순간엔 갑자기 화가 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사과를 해야 하는 게 정말 자신이 맞나 싶은 억울한 마음. 나라고 기분 나쁜 적이 없었을 것 같으냐고 속 좁게 소리치고 싶은, 그런 느닷없는 서러움 같은 것이 몰려왔다.
화를 내며 묻고 싶은 건 사실 사자 자신이었다. 너야말로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도깨비 신부를 언제 데려갈지 모를 저승사자, 그냥 한 집에 사는 하우스 메이트, 그것도 아니면, 어쩌면, 친구 그 비슷한 것. 그중에 자신이 어떤 분류에 속하고 있는지 사자야말로 궁금했다. 물론 사자는 그 말을 진짜로 묻지는 못했다.
굳게 문이 닫힌 도깨비의 방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 말을 듣기나 했는지. 이 문을 열고 들어가 눈을 보고 얘기하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사자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할 자신은 없었다.
답 없는 문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선 사자는 방 안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도깨비를 발견하곤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신은 표정 변화도 없이 가만히 서서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는 사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내가 내 방 문 앞에 있는 게 이상한 건가?”
바락 성을 내는 사자를 향해 도깨비는 동요 없이 심드렁히 답했다. 놀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던 사자는 그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라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언제부터 있었어?”
신은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사자의 눈썹 사이가 눈치를 보듯 살짝 찌푸려졌다.
“혹시 내가 한 얘기… 들었냐?”
“뭐.”
“내가 방금 한….”
미안하다는 말. 그 말을 사자는 입 안에서 삼켰다.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진짜로 들었을까 봐 걱정스러우면서도, 설마 진짜 못 들은 건가 염려가 되기도 했다. 이중적인 마음이 동시에 들자 스스로도 어지러워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까지 사자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던 신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비켜.”
무심한 말투에 사자는 마치 말 잘 듣는 어린 애처럼 퍼뜩 몸을 비켜 섰다. 사자가 가로막고 있던 길이 열리자 신은 더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 차가운 냉대를 보고 나니 사자는 방금까지 그에게 사과하려고 했던, 아니, 이미 사과했던 마음이 아주 없었던 일인 것처럼 싸그리 사라져버렸다. 진짜 저렇게까지 쌩할 필요 있어? 사자는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자신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다시 튀어나올 기분도 아니었고, 방 너머의 도깨비가 그 말을 듣고 싶어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늦은 저녁이나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쿵쿵 집안 전체를 울리도록. 야만적인 도깨비의 식사야 저가 알아서 챙겨 먹으러 나오겠거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자가 다시 도깨비의 방 문 앞에 선 건 그가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한참 드라마를 시청한 후에도 코빼기를 비추지 않는 도깨비 때문이었다. 사실 식탁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의식의 반쯤은 도깨비의 방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입 안의 당근이 몇 조각으로 나뉘어졌는지 확인하듯 하나하나 씹어 먹으면서도 눈은 일부러 저를 피하나 싶을 만큼 조용하기만 한 방 문을 향했다.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면 또 모를까, 사자는 어쨌든 신경 쓰이기 시작한 일에 대해 아예 무심하지는 못하는 성격이었다.
대체 방 안에서 나오지도 않고 몇 시간 동안 뭘 하는 걸까. 자기 기분 안 좋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저렇게 티를 낼 거면 차라리 나와서 대놓고 화를 내며 싸웠으면 더 좋겠다 싶기도 했다. 어느 부분에서 저만큼 화가 난 건지 말이라도 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도깨비가 저렇게 꽁하게 입 다물어 버리는 성격인 줄 알았더라면 저번에 계약서를 작성할 때 ‘화나는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바로 말하기’ 같은 조항도 넣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그건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자를 위해서도 필요한 항목이었음이 분명하다.
문을 노려보며 나무결이 얼마나 촘촘하고 고풍스러운지 따위나 확인하고 있던 사자가 아무 수확도 없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누가 있기는 한 건가 싶게 조용하기만 하던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동시에 벌컥 문이 열리고 도깨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자는 드디어 나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으면서도 자신이 기다렸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도깨비의 옷차림이 외출이라도 할 모양인지 말끔했다.
“…어디 가?”
궁금하지만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냥 눈에 보여서 물어보는 것처럼, 넌지시 묻는 사자의 말에 도깨비는 단박에 아니, 하고 답했다. 그 미덥지 않은 대답에 나가지도 않을 거면서 뭘 그렇게 차려 입었냐는 말이 사자의 입에서 거의 반쯤 흘러나왔을 때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듯 무신경한 표정의 도깨비와 눈이 마주쳤다. 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짧은 휴지기 뒤에 먼저 입을 연 건 사자였다.
“밥은 먹었냐.”
여기에 사는 인간들이 상대방의 식사 여부로 모든 걸 해결하는 걸 종종 봐왔다. '밥은 먹었냐'로 안부를 묻는 걸 대신하기도 했고, 인사를 전하기도 했으며, 서먹한 관계를 풀기도 했다. 그러니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본 건 뜬금없는 질문이 아니라, 사자의 입장에선 일종의 사과 신청인 셈이었다. 사과가 낯간지럽다면 휴전 신청이라고 해도 좋았다. 물론 받아들이는 도깨비가 그렇게 해석했을지는 미지수였다. 돌아온 대답이 어, 하고 짧은 단답이 다인 걸 보면 그 의미가 온전히 전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자는 다시 한번 묻기로 했다.
“언제? 방에서 내내 안 나오더니.”
이번엔 꽤 노골적인 뜻을 담았다. 네가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그 시간을 내가 의식하고 있었다는. 이 정도면 피식 웃을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은 전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사자를 향하는 신의 눈동자엔 서툰 사과를 기꺼이 받아주려는 뜻이 담겨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대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성가신 기색만 가득했다. 그는 후, 하고 불길 같은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어디에 가려는 게 아니라 어디에 갔다가 지금 들어온 거고, 밥은 나가서 먹었어.”
딱딱하고 빠르게 말을 끝낸 신이 눈가를 찌푸리며 확인하듯 물었다. ‘됐어?’ 그 두 번 말하기도 싫다는 듯 말꼬리에 붙은 언짢음이 사자의 마음 어딘가를 콕 찔렀다. 동시에 사자의 손끝이 싸늘해졌다. 손가락을 타고 내려온 냉기가 그가 서 있는 바닥까지 전해졌다. 츠즈즈. 사자의 발 아래가 얼음으로 뒤덮였지만 둘 중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도 입을 뗀 건 사자가 먼저였다.
“왜 그러는 건데.”
“뭐가.”
사자가 아랫입술을 깨물듯이 잘근 씹었다. 모르는 척 되묻는 도깨비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화내냐고.”
“화 안 났어.”
“똑바로 말해. 화 내고 있잖아, 지금.”
사자는 저승사자로서 숱한 세월을 거쳐오며 적어도 화를 내는 감정과 화를 내지 않는 감정의 상태 정도는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았다. 상대방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것. 눈이 마주쳤음에도 투명인간을 대하듯 시선을 돌려버리는 것. 대답이 짧은 것. 모르는 얼굴을 마주한 것처럼 낯설게 바라보는 것. 무엇보다, 화 났냐고 물었을 때 석고상처럼 굳은 얼굴로 화가 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 사자가 알고 있는 화의 징후를 눈 앞의 도깨비가 모두 보여주고 있었다. 사자보다 몇 백 년을 더 살았던 도깨비가 그와 비슷한 수준의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거란 소리다.
사자는 먼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도깨비를 대신해 자신이 다시 한번 양보하기로 했다.
"아까 마트에서 들은 그 말 때문에 그러는 거면 그건 내가 미안-"
"그래서?"
사자의 말이 탁 잘렸다. 영문을 모르고 말을 멈춘 사자를 향해 도깨비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내가 화가 났으면,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
“네가 무슨 상관이야.”
차가웠다. 얼음의 기운이 도깨비에게 옮겨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다. 너무 낯선 기색이라 사자는 뭐라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들이 가벼운 말다툼을 하는 건 한 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사과를 해도 받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신은 마치 자신이 화가 난 건 그게 아니라는 듯 더 싸하기만 했다. 사자는 저를 향하고 있던 냉담한 얼굴이 돌아서는 걸 어쩔 줄을 모르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자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던 신은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멈칫 동작을 멈췄다. 사자가 바라본 신의 뒷모습 위로 순식간에 화르륵 불길이 치솟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걸 자각할 새도 없이 부지불식간 신의 얼굴이 사자의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너무 갑자기라 피할 수도 없이 마주한 시선은 그를 녹여버릴 듯 뜨거웠다.
“너야말로 똑바로 말해.”
신의 음성은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낮았지만 고함을 지르는 것보다 더 깊게 들어와 박혔다.
“내키는 대로 왔다 갔다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어쨌는데. 사자의 말이 어느덧 신이 사라져버린 공중에서 부질 없이 흩어졌다.
“끝방 삼촌! 우리 삼촌 어디 갔는지 알아요?”
홀로 식탁 끝에 앉아 시금치 스튜를 한 스푼 뜨던 사자가 저를 향해 다가오며 묻는 덕화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요즘 통 안 보이던데.”
덕화는 금방이라도 제 입을 얼려버릴 듯 노려보는 사자의 서늘한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굴렸다. 그는 오로지 신의 행방을 추리하기에 바빠 보였다.
“밖에 돌아다니는 거 안 좋아하던 양반이 이젠 아예 집에 들어올 생각도 안 하네. 집에 뭐 싫어하는 거 들여놓은 사람처럼 밖으로만 나도는 게 영 수상하단 말이야. 그쵸, 끝방 삼-”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거의 내뱉은 후에야 사자의 얼굴을 확인한 덕화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사자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서슬 퍼런 빛을 내며 온 집안을 얼려버릴 것 같았다. 어쩐지 집이 추워진다 싶더라니. 덕화는 닭살이 오소소 돋은 제 팔을 문지르며 괜히 보일러 탓을 했다.
“보, 보일러가 고장이 났나. 확인 좀 해, 해봐야겠네.”
덕화는 들어왔던 문을 통해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사라지는 덕화의 뒷모습에 대고 공연히 살얼음을 내뿜던 사자의 눈이 텅 빈 맞은편 의자를 보곤 푸스스 빛을 잃었다.
그날 이후로 도깨비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전에도 집에서 살갑게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일이 많았다고는 할 수 없었고, 자주 대화를 나눌 만큼 썩 원만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꼭 정하지 않아도 식사 시간 정도는 함께 했었다. 그건 약속도 아니었고, 계약도 아니었다. 각자의 식사를 알아서 챙기는 것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만큼은 어긋남이 없어 본의 아니게 늘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곤 했었다.
헌데 최근 며칠은 그 시간마저도 도깨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자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이건 도깨비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거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반도 채 비우지 못한 스튜 접시 위로 사자의 스푼이 나동그라지듯 내던져졌다. 그가 뿜어대던 냉기에 차갑게 얼어붙은 접시가 스푼이 닿자마자 청쾌하다 싶을 만큼 맑은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산산조각 난 접시 위로 스튜가 흘러 나와 식탁 위가 금방 초록으로 어지러워졌으나 그건 별로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딱 봐도 도깨비가 아끼는 게 분명할 것 같은 고아한 접시가 깨진 것 역시 사자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접시가 깨진 것 때문에 그 잘나신 도깨비의 낯짝 한번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불편하고 께름칙한 감정을 며칠이나 묵혀두고 그냥 지나치는 건 사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여태껏 이만큼 지속적인 감정의 교류를 섞을 만큼의 관계도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도깨비와는 달랐다. 싫으나 좋으나 어쨌든 한 집에 사는 관계가 아닌가.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거였다. 그것만으로도 이 지지부진한 감정 싸움을 해결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 사자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깨진 접시를 치우며 오늘은 기필코 도깨비의 얼굴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루 온종일 옷자락 휘날리는 것조차 볼 수 없었던 도깨비가 드디어 모습을 보였을 때엔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문을 열고 컴컴한 거실로 들어선 신은 어둠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는지 곧장 제 방으로 향하지 않고 잠깐 거실 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쩌면 그냥 잠깐 멈춰있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소파에 앉아있던 사자의 뒤통수를 이미 발견했었거나.
가라앉은 집안의 공기를 뚫고 ‘늦었네’라고 튀어나온 사자의 목소리에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던 신을 보면 마지막 가설이 제일 그럴듯해 보였다.
“얘기 좀 해.”
소파에서 일어난 사자가 신을 돌아보며 한 말에 그는 부엌으로 향하며 무심히 답했다.
“하고 있네. 얘기.”
평소라면 싱거운 농담이라며 비웃었을 테지만 사자는 지금 그런 것에 맞장구 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선 신의 뒤에 몇 발자국 떨어져 섰다. 신은 모르는 척 태연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목이 말랐는지 생수 하나를 꺼낸 그는 냉장고 문을 살짝 열어둔 채로 물을 들이켰다. 미처 다 닫히지 못한 틈 사이로 주홍색을 닮은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와 신과 사자의 사이를 밝혔다.
신이 사자를 돌아본 건 물을 반 통쯤 비우고 난 후였다. 그는 입가에 맺힌 물기를 손끝으로 대충 훔쳐내듯 닦으며 사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굳게 다물어진 사자의 입술이 어둠 속에서 불빛을 받아 유난히 더 붉어 보였다. 평소에 그저 하얗다고만 생각했던 그의 낯빛은 다른 불빛과 섞여 오묘한 색을 냈다. 신은 그 모습을 잠잠히 보고 있었다. 얘기 좀 하자던 사자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너 나랑 친구하고 싶어?”
마침내 열린 사자의 입을 통해 나온 얘기라는 것이 황당하기 그지없어 신은 ‘뭐?’라고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랑 친구하고 싶었냐고.”
물어보는 말의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신은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올라간 입꼬리가 절대로 즐거워서는 아니었다. 그는 들고 있던 페트병을 식탁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난데없는 사자의 물음에 답하는 목소리 역시 신경질적이었다.
“내가 너랑 그런 걸 왜 해.”
“그럼 설명해.”
“뭘.”
“내가 내킬 때마다 왔다 갔다 한다는 말. 그게 무슨 뜻인지.”
신이 바라본 사자의 얼굴은 자신이 물어본 말 그대로라는 듯 아무런 속뜻도 담고 있지 않았다.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였다. 그게 신을 더 짜증스럽게 했다.
사자는 늘 저 모양이었다. 다른 속내 같은 걸 조금도 담지 않는 저 멀건 얼굴로 매번 당황스럽게 모르는 척을 했다. 조금 가까워졌다 싶다가도 어느 순간엔 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표정으로 멀찍이 떨어져 선 채 신을 바라볼 때에도, 늘 저 투명한 얼굴이었다. 차라리 어떤 이유로 신이 싫어졌다거나, 말도 섞기 귀찮다거나 하는 거였다면 그의 퉁명이 당황스럽지도 않았을 거다. 사자는 그저 어느 순간 문득, 어떤 이유도 없이, 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도 브레이크에 걸린 것처럼 말을 멈추곤 했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일시 정지 상태로 가라앉아 있었다. 사자가 다시 입을 열 때면 그와 신의 사이엔 그 잠깐 동안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겨있었다.
매일 티격태격 유치하게 말싸움을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그런 말다툼조차 관계 맺기의 종류 중 하나라면, 사자가 종종 보이는 그 태도는 아예 관계의 부정 같은 거였다. 그냥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던, 서로 말을 섞지도 않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원점의 상태가 되는 거였다. 그럴 때마다 신은 진절머리가 났다. 사자의 그 무미건조한 표정을 마주하고 나면 알 수 없는 피로감이 밀려와 그와 두 번 다시 말을 섞지 않고 싶어지기도 했다. 신이 화가 나는 건 그거였다. 하지만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하는 건 조금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노란 불빛 아래로 드러난 사자의 얼굴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이내 냉장고 문을 닫아버렸다. 맑게 비치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잠겼다. 도깨비는 그 얼굴이 사라진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나중에 얘기해.”
“나중에 언제. 너 내가 물어본 거에 대답 안 했어.”
“내가 너한테 그걸 왜 설명해야 하는데?”
귀찮음이 묻은 도깨비의 어투에도 사자는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왜? 대답하기 어려워? 그럼 다른 거 물어볼까?”
창 밖으로 비치는 달빛에 어슴푸레 실루엣만 보이는 사자의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너랑 나를 친구라고 해?”
이번 질문도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신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묻잖아. 우리 같은 사이를 친구라고 하냐고.”
차라리 진지하지 않다면 장난치는 거냐고 화라도 냈을 거다. 하지만 나랑 말장난 하는 거냐고 황당해 하며 묻는 신에게 사자는 오히려 더 심각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너랑 장난하자는 걸로 보여?”
보이지 않는 사자의 얼굴을 향해 신은 뭐라고 답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친구? 우리가 친구인가.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넌 나를 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냐. 신은 혀끝에서 맴맴 도는 그 말을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냥 '됐다'하고 이 대화를 갈무리하려고 했다.
“되긴 뭐가 돼. 내가 물어보잖아. 우리 친구냐고.”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포기하지도 않고 끈질기게 묻는 사자의 말에 신이 버럭 성을 냈다.
“됐다고!”
“좀 알려줘!”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인 사자의 음성이 조금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이 뭐라 입을 떼려는데 사자가 그 말을 막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네가 좀 알려 달라고! 난 모르겠으니까 오래 산 네가 좀 알려주란 말이야!”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설움 같은 게 섞여 있었다. 신은 그 반응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새액새액 숨을 내쉬며 토해내는 사자의 말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친구가 뭔지 내가 알게 뭐야. 그런 게 있어본 적이 없는데!”
물론, 언젠가 사자에게도 그런 게 존재했을 때가 있었을 거다. 문제는 그게 사자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는 거였지만. 친구. 그 생김조차 낯설고 생소한 단어를 속으로 굴려보던 사자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너는 다 기억이 나겠지만… 나는 아냐. 모르겠다고. 친구 그런 거.”
“…….”
“그러니까 네가 좀 알려주면 되잖아, 이 성질 더러운 도깨비야.”
사자는 저가 말해놓고도 제 말에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왜 이런 걸 도깨비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도깨비가 제 사정은 생각도 안 하고 저렇게 성질만 부리는 게 분했다.
저승사자의 삶이 길어질수록 이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빌려 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꼭 내가 아니어도 상관 없을 것만 같은, 누구에게 물려줘도 상관 없는 삶. 그런 게 삶의 목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한때 사자가 주인이었던 삶이 더 멀어지고 희미해질 때면 그런 생각은 더 짙어졌다. 이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는. 그러면 저승사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만 충실해졌다. 감정은 옅어지고 관계는 끊어졌다. 그렇게 오롯이 저승사자의 역할로만 살았다.
그런 와중에 도깨비를 만났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자와 달리 도깨비의 기억엔 900년이라는 시간이 오래된 앨범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자신을 스친 사람들을, 저와 인연을 맺은 인간들을 그는 다 기억해서 괴로워했지만 사자는 그런 그를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조금 부러워했다. 생전 살았던 인간의 삶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자신과 달리 신은 도깨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사자가 그의 앞에만 서면 사라졌던 감정이 다시 되돌아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던 건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곁에서 900년을 산 마음 약한 도깨비 때문에.
그건 사자에게 생소한 거였다. 사라지던 것들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은 어지러웠다. 도깨비와 대화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그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말을 하다 보면 꼭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말을 멈춰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건 정말 많이 낯선 기분이었다. 싫다기 보다는, 그래, 낯설었다. 싫은 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거라서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걸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저렇게 화만 낼 일인가? 사자의 눈 안에 억울함이 차올랐다. 원래도 물기가 많은 눈은 곧 파도라도 칠 듯 일렁거리다가 저를 향하고 있는 도깨비의 시선을 피해 돌아가버렸다. 어차피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신은 대답이 없었다. 사자는 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애가 탔다. 마음 같아선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보채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할 배짱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숨을 몰아 쉬며 기다리기만 했다.
그들을 에워싼 모든 공간이 도깨비가 만들어낸 정적에 먹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저대로 굳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신이 한참 만에 반응했을 때엔, 말이 아니라 몸짓이었다. 그는 사자의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 동작에 사자는 저도 모르게 빳빳하게 긴장하고 말았다. 다가온 신의 얼굴이 희미한 빛을 받아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멱살이라도 잡히는 거 아닐까 싶어 조심스레 눈을 들어 신의 얼굴을 바라본 사자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천천히 드러난 신의 눈은, 믿을 수 없게도, 조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는 조근조근 다정하게까지 느껴졌다.
“알려줄게.”
“…….”
“알려줄 테니까 잘 따라오기나 해, 저승사자 친구.”
말을 마친 신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사자는 그 입꼬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이 픽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그렇게 멍청히 굳어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에야 조용한 거실에 혼자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자는 홀로 남아 두 눈을 꿈뻑거리며 제 볼이 조금 달아오른 걸 느끼기도 했다. 집 안이 어두워서, 신이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자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왔다. 아침이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침대에 누워 조금 뒤척이다 보니 새벽 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동살이 잡히는 걸 몽롱한 정신으로 지켜보고도 한참 더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방을 나섰을 때 도깨비를 마주치게 되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런 것 따위를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벌떡 몸을 일으킨 건 자신이 대체 왜 이런 걸 고민하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어서였다. 그냥 평소처럼 인사하면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온 사자는 조용한 거실을 보고 다소 싱거워졌다. 도깨비는 아직 자는 건지 기척이 없었다. 괜히 거실을 배회하던 사자는 일단 욕실에서 씻고 나온 후 부엌으로 가 아침을 준비했다. 샐러드 드레싱을 만들면서도 눈은 도깨비의 방을 힐긋거렸다. 왜 도깨비를 신경 쓰는 건가 싶으면서도 자꾸 그쪽을 의식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뭣보다 어젯밤 그가 낯선 목소리로 뱉었던 말이 새벽 내내 사자를 괴롭혔기 때문에 더 그랬다.
‘알려줄게.’
떠오르는 음성에 사자는 그 목소리를 떨쳐내려 머리를 털었다. 알려주긴 뭘 알려줘, 도깨비 자식. 속으로 꿍얼거리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 도깨비의 방 문이 열렸다.
"너 속으로 내 욕하지 마라. 다 들린다."
방심해서 무심코 흘린 속말이 도깨비한테 닿은 모양이었다. 뭐, 뭐가, 하며 모르는 척 말을 더듬는 사자를 힐끔 바라본 신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인덕션 앞에 섰다. 익숙하게 프라이팬을 꺼내 든 그는 늘 그렇듯 고기 한 덩이를 굽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자는 그런 신을 지나쳐 다 만들어진 샐러드 한 접시를 식탁 위에 놓으며 앉았다. 포크를 들기 전 신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는 고민을 잠깐 했으나 곧 관뒀다. 언제부터 그런 것까지 신경 썼다고.
사자가 신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묵묵히 샐러드 접시를 비우고 있을 때, 스테이크를 먹음직스럽게 구워낸 신도 식탁 앞으로 다가와 의자를 빼 앉았다. 왼손엔 포크를, 오른손엔 나이프를 반듯하게 들어 고기를 썰던 그가 지나가는 투로 말을 꺼냈다.
“나 지금 밥 먹을 건데 넌 안 먹을래?”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사자는 갑자기 식탁 위로 내던져진 엉뚱한 말의 의미를 해독할 수가 없어 고개를 들었다. 신은 먹기 좋게 썬 스테이크를 입에 넣기 전에 말했다.
“친구끼리는 그런 거 물어보는 거야, 우정에 무지한 저승사자.”
“…….”
“그러니까 너 밥 먹을 때는 나도 불러.”
신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한입 크기의 스테이크를 제 입으로 쏘옥 집어넣었다. 평소 같으면 그 광경을 보며 야만적이기 그지 없군, 같은 소리를 했을 사자는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도깨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할 뿐이었다.
“…어.”
그 작은 대답이 저의 입을 통해 나온 게 믿기지 않았지만 굳이 주워 담지는 않았다. 사자의 대답을 들은 도깨비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 보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식탁 위로 식기 소리가 편안하게 울렸다.
-
*...ㅎ? 너희 그거 친구 아냐 ..ㅎ (쳐답답)
*캐..붕.........? 뭐 이런 유치한 걸로 싸우나 싶은 900살x300살이지만, 원래 사랑 싸움은 유치해야 제맛 아님?(아님)
*거북이 마라톤 수준으로 진도를 빼는 깨비사자와 거창한 스토리랄 게 없는 글인데 기다리며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고맙읍니다… 진짜로요..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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